퀵 윈 과제, 자존감의 약

<19년 살아본 보고서> 8. 살아가는 법에 대하여 - 5

by 문현호

'영재고'라고도 불리는 경기과학고등학교에서 2학년이 된 저는 낮은 성적 문제와 애착 불안 문제를 동시에 마주했습니다. 자존감은 무너지고, 마음의 안식처는 무너졌으며, 심한 우울증이 찾아왔습니다. 8장 '살아가는 법에 대하여'에서는 제가 그 우울증에서 어떻게 벗어났는지, 어떻게 자존감과 행동력을 되찾았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열쇠 3, 퀵 윈 과제

리더십에서 다루는 개념 중에는 Quick Win, 퀵 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팀과 리더에게 기본 업무와 목표가 있다면, 그 업무에서 처음으로 성과를 내는 데에는 굉장히 오랜 시간과 많은 노력이 필요해요. 하지만 만약 팀이나 리더에게 기존의 성과가 없다면, 그 첫 성과를 내기 전까지의 과정은 아주 길고 힘들어집니다. 오히려 단기적으로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고, 작은 실패라도 생기면 팀원들과 리더는 앞으로의 업무도 잘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지게 돼요. 구성원과 팀에게 자신감이 없는 상태가 이어지는 거죠.

그때 그 팀에게 자신감을 불어주는 작은 과제를 퀵 윈 과제라고 부릅니다. ‘빠른 승리’, 혹은 ‘즉각적 성과’라는 말로도 부르죠. 이 작은 과제는 기존의 업무보다는 더 짧은 시간과 적은 노력이 필요하고, 성공할 가능성이 더 높아요. 그리고 이렇게 작은 과제가 성공한다면 팀에게 작지만 확실한 성과가 생기고, 팀원들과 리더에게도 자신감이 생깁니다. 물론 이 퀵 윈 과제는 상당히 모호하기 때문에 설계하기 어렵고, 그 설계와 진행의 결과는 리더의 능력에 따라 크게 달라져요. 하지만 성공할 경우 그 효과는 확실합니다.

단순히 팀이 아니더라도, 개인에게도 이런 퀵 윈 과제는 필요합니다. 스스로에 대한 효용감과 자신감을 가지기 위해서, 노력이나 시간은 적게 들지만 확실하게 승리할 수 있는 과제는 필요해요. 같은 이유에서 우울하다면 일단 침대를 정리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침대 정리를 ‘해내면’ 작은 효용감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고, 그 자신감으로 더 큰 일을 처리할 수 있다는 말이에요.


저는 마침 현실 도피 행위에 조금씩 질리고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유튜브나 애니메이션만 보고 10시간 넘게 잠을 자다 보니, 더는 재미가 없더군요. 거기다가 일기를 쓰고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극단적인 우울감도 조금 사라져갈 때 쯤, 저는 조금 다른 일, 조금 재밌는 일을 좀 하고 싶어졌어요. 그냥 가만히 영상을 보는 것보다 조금 더 재밌는, 조금 더 생산적인 일을 말이에요.

저에게 일기는 당시 유일한 퀵 윈 과제였습니다. 일기 쓰기는 큰 노력이나 시간이 들지 않았고, 금방 성취감을 가져다줬어요. 하지만 일기는 하루 10분에서 20분이면 충분히 썼고, 시간은 여전히 많이 남아있었습니다. 저는 더 자극적인 일을 하고 싶었어요.

이렇게 되니 제가 원래 하고 싶었던 것들이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것들을 일기에 적었어요. 신기하게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영상 제작이었습니다. 유튜브를 그렇게 많이 보다 보니, 가끔 편집을 되게 멋있게 하는 영상들을 볼 때마다 저는 그런 영상을 직접 한 번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애초에 초등학교 때부터 스톱모션 UCC와 1인 방송 영상을 만들면서 편집 프로그램은 써본 적이 있었으니까요.

다음은 전자공학이었습니다. 중학생때부터 분명 저는 아두이노(Arduino)를 이용해서 어떤 전자 장비를 만들고 싶었어요. 다만 저항이나 전류 같은 계산 문제와 장비 불량 때문에 한 번도 성공시키지 못했죠. 하지만 물리학에서 전자기학을 배운 지금이라면, 조금 더 잘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동시에 떠오른 것이 프로그램 개발이었습니다. 제가 이때 만들 수 있는 건 C 언어를 바탕으로 한, 검은 프롬프트 창이 뜨는 프로그램 뿐이었어요. 하지만 다른 설치형 프로그램이나 애플리케이션을 생각해보면, 그런 앱들은 조금 더 예쁘고 사용하기 쉽죠. 저는 그런 예쁘고 사용하기 편한, 가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보고 싶었고, 그 방법을 배워보고 싶었습니다.

다음은 악기와 작곡이 떠올랐고, 중학교때부터 했던 비즈 공예가 떠올랐고, 세포 배양 연구가 떠올랐고, 일본어 공부가 떠올랐고, 못 읽은 책들이 떠올랐고, 요리가 떠올랐고, 소설 쓰기가 떠올랐고, 시 쓰기가 떠올랐고, 블로그가 떠올랐습니다. 저는 신기하게도 하고 싶은 것이 정말 많은 사람이었어요. ‘할 수 없다’라는 생각이 천천히 사라지면서, ‘하고 싶다’는 생각이 엄청나게 떠오르기 시작한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너무 다양한 것들을 당장 하고 싶다고 말하면, 느낌이 많이 이상해지죠. 저것들 중 절반 이상은 그냥 쓸모없어 보이지 않나요? 그래서 누군가는 말합니다. ‘선택과 집중’을 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요.

하지만 저는 저런 자잘한 꿈들을 하나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어요. 여기서 포기하면 또 이전처럼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우울한 시간을 보내게 될 것 같았죠. 마침 운이 좋게도 저에게는 코로나19 팬데믹 덕분에 시간이 정말 많았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저는 저 모든 것들을 해보게 되었어요. 선택과 집중, 그런 건 개나 줘버리라면서 말이에요. 더 생각할 거 없이 일단 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성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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