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 살아본 보고서> 8. 살아가는 법에 대하여 - 6
'영재고'라고도 불리는 경기과학고등학교에서 2학년이 된 저는 낮은 성적 문제와 애착 불안 문제를 동시에 마주했습니다. 자존감은 무너지고, 마음의 안식처는 무너졌으며, 심한 우울증이 찾아왔습니다. 8장 '살아가는 법에 대하여'에서는 제가 그 우울증에서 어떻게 벗어났는지, 어떻게 자존감과 행동력을 되찾았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저는 퀵 윈 과제를 이용했습니다. 퀵 윈 과제는 반드시 빠르게 성공하는 아주 작은 과제를 의미합니다. 이는 작지만 확실한 성취감을 제공하며, 팀과 개인에게 자신감과 자존감을 빠르게 채워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이용했던 퀵 윈 과제들을 알아보겠습니다.
일단 도전하기: 통기타
가장 먼저 했던 것 중 하나는 기타였습니다. 마스크 대란과 외출 제한이 생기고 밖에서 즐길 수 있는 일이 줄어드니, 저와 동생은 집에서 즐길 거리를 찾아야 했어요. 그리고 저는 이미 영상물에 질려있었죠. 그리고 부모님께서는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구매하라 하셨고, 저와 동생은 그 기회에 좋은 통기타를 하나 구매했습니다. 원래도 기타가 하나 있었지만, 너무 낡았었거든요.
그리고 그 통기타는 제 방으로 왔습니다. 통기타를 둘 적당한 자리가 제 방에만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또 저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본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버스킹 공연을 하는 선배가 너무 멋있었던 기억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같은 해 음악 시간에 기타를 조금 배웠는데 그게 생각보다 할 만 했거든요. 그래서 이번 기회에 통기타를 제대로 다뤄보고 싶었습니다.
통기타는 소리도 잘 나고 음도 많아서 혼자 가지고 놀기에는 최적이었습니다. 대신에 코드를 외워야 하고, 손끝에 굳은살이 박힐 정도로 연습을 해서 양 손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야 했어요. 하지만 제게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코드를 외우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한 규칙 몇 개가 전부였어요. 대신에 핑거스타일 같은 멋진 건 못하고, 그냥 스트로크만 잘 했습니다. 저는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재밌었어요. 웬만한 밴드 음악은 단순한 코드의 반복이었고, 저는 곡을 들으면 그 코드의 구조를 알 수 있었습니다. 결국 저는 웬만한 밴드 음악은 부르면서 연주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어요.
무엇보다도 저는 그 코드 사이의 느낌을 정말 좋아했습니다. 예를 들어 다장조에서 G 코드로 시작한 한 마디 다음에 Am 코드가 온다면, 약간의 ‘긴장을 풀어주는 느낌’에서는 보통 다음에 F가 오고, 마지막은 C나 Em가 되겠죠. F가 반복되면 느낌을 바꿀 수 있고요. ‘긴장을 조인다면’ F의 자리에 Em/G나 Em/B가 오고, 다음은 C는 좀 그렇고 보통은 F의 변형이 될 겁니다.
저는 이런 식으로, 코드 사이의 전개에서 말로 쉽게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타를 배우고 나니, 직접 이런 전개를 마음껏 만들어볼 수 있게 된 거에요. 그래서 저는 주로 기타를 잡으면 다른 곡이나 악보에 맞춰 연습하기보다는, 그런 코드 사이의 전개와 구성을 마음대로 만들어보면서 그 조합의 느낌을 즐기곤 했습니다.
아마 이런 경우는 흔치 않을 거에요. 신기하게도 제게는 절대음감이 있었습니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말이에요. 저는 동시에 화성학과 음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복잡한 재즈 코드 같은 건 잘 모르지만, 전반적인 화성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수준이었어요. 그래서 음악은 제게 좋은 놀이터이자 휴식터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그렇습니다.
기타는 당시의 제가 가지고 있던 몇 안 되는 즐길거리였어요. 온라인 개학 후에도 저는 Zoom에서 진행하는 몇몇 지루한 수업 시간에 ‘얼굴만 카메라에 비추고’ 그 아래에서 기타를 치곤 했습니다. 쉬는 시간에도 음악을 듣거나 기타를 쳤고, 수업이 끝나도 마찬가지였어요. 일을 하다가도 조금 쉬고 싶을 땐 책상 옆에 세워진 기타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오랜 시간 기타를 혼자서 잡고 치다 보니, 신기하게도 기타의 실력이 빠르게 늘더군요. 어느 순간에는 핑거스타일 주법도 조금씩 되기 시작했고, 멜로디 연주도 조금씩 가능해졌습니다. 다음 해 음악 수업에서 작은 공연을 준비할 때, 저는 이미 어떤 통기타 기반의 곡을 잡으면 그 곡을 문제 없이 연주할 수 있는 수준이 되어있었어요.
이때 배운 통기타는 저에게 세 가지의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다줬습니다. 첫 번째는 심리적 안정이에요. 기타를 칠 때 얻는 안정감은 다른 어떤 취미보다도 컸고, 불안한 일이나 지친 생각을 쉽게 잊게 해줬어요. 무엇보다도 제가 그 행위에 몰입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나오는 소리가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잘 짜여진 음악 자체의 아름다운 느낌이 마음에 들었고, 게다가 제가 제 원하는 대로 그 음악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점도 좋았던 것 같아요.
두 번째는 작은 성취감입니다. 기타를 치며 제가 원하는 대로 코드를 만들다 보면, 그 중에 정말 마음에 드는 아름다운 전개를 느낄 때가 자주 있었어요. 저는 그럴 때마다 큰 성취감과 쾌감을 짧게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떤 노래를 완벽하게 연주하고 노래해낼 때도 성취감이 느껴졌고, 이전에 비해 실력이 늘었다는 사실을 느낄 때도 같은 성취감이 느껴졌어요. 이렇게 보면 악기는 성취감을 아주 쉽게 얻을 수 있는 대상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심리적으로 불안하거나 우울할 때는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는 말이 있어요. 음악 자체가 주는 심리적 안정도 있고, 악기 자체가 감정을 절제 없이 표현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주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몰입하여 성과를 내는 활동을 통해, 괜히 떠오르던 불안으로부터 멀어질 수도 있고요. 그리고 저는 이런 음악의 효과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세 번째는 스스로에 대한 성장 가능성입니다. 저는 원래 통기타를 잘 만지려고 하지 않았어요. 중학교 때 처음 동생과 함께 기타를 연습해 본 적이 있었는데, 동생은 이전부터 통기타를 연습한 경력이 있어 익숙했던 반면 저는 그걸 따라가지 못했거든요. 오히려 기타를 연습하려 하면 뭔가 제가 더 부족하고 한심한 느낌이 들어서, 그 부끄러움이 싫어서 저는 원래 기타를 가까이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저는 제가 완벽하지 못한 게 있으면 드러내지 못하고 부끄러워했어요. 다른 사람들이 절 무시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코로나가 터지고 나서, 동생이 피아노를 치거나 낮에 온라인 수업을 듣는 동안 저는 기타를 잡게 되었어요. 막상 코드를 칠 수 있게 된 후에는 신기하게도, 동생의 무시에 대한 불안보다는 제 스스로의 만족감이 더 커졌죠. 그렇게 저는 저보다 기타를 잘 하는 사람이 있어도 계속 기타를 연습하게 되었습니다. 막상 기타를 칠 때는 그 연주에 몰입을 하게 되니, 옆 방에 있는 사람 눈치까지 볼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어요.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막상 아무도 제 실력 부족과 노력에는 관심이 없다는 사실 역시 깨달았습니다. 하물며 바로 옆 방에 있는 동생도 저에게 관심이 없는데, 제가 친구들보다 성적이 조금 낮고, 더 높이려고 노력한다는 이유로 그 노력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었어요. 저는 제가 저를 한심하게 보는 것만큼 그 사람들이 제 노력을 한심하게 볼까 걱정했지만, 막상 그들은 저에게 관심이 없겠죠. 저도 그들에게 관심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신기하게도 저는 가을이 되었을 때 이미 동생보다 기타를 꽤 잘 치는 사람이 되어있었습니다. 동생이 연습한 곡은 거의 이길 수 없었지만, 그 외의 곡들은 자신 있었어요. 저는 곡을 듣기만 해도 코드를 거의 맞출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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