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 살아본 보고서> 8. 살아가는 법에 대하여 - 7
'영재고'라고도 불리는 경기과학고등학교에서 2학년이 된 저는 낮은 성적 문제와 애착 불안 문제를 동시에 마주했습니다. 자존감은 무너지고, 마음의 안식처는 무너졌으며, 심한 우울증이 찾아왔습니다. 8장 '살아가는 법에 대하여'에서는 제가 그 우울증에서 어떻게 벗어났는지, 어떻게 자존감과 행동력을 되찾았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저는 퀵 윈 과제를 이용했습니다. 퀵 윈 과제는 반드시 빠르게 성공하는 아주 작은 과제를 의미합니다. 이는 작지만 확실한 성취감을 제공하며, 팀과 개인에게 자신감과 자존감을 빠르게 채워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이용했던 퀵 윈 과제들을 알아보겠습니다.
되는 과제와 안 되는 과제: 작곡과 영상 제작
다음으로 시도했던 것은 작곡이었습니다. 저는 이때 곡 하나를 만들고 있었고, 그 곡을 꼭 완성하고 싶어했어요. 저는 원래 음악을 좋아했고, 음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원래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내 작곡 동아리에도 들어있었고, 활동에도 많이 참여했어요. 막상 배운 내용은 주로 미디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방법이었지만 말이죠.
이때 저는 제가 가지고 있던 극한의 불안과 슬픔, 괴로움과 억울함 같은 감정을 꼭 노래에 담고 싶었어요. 저에게는 그런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곳이 없었기에, 노래라는 매개체를 더더욱 원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딱 하나의 멜로디와 분위기를 잡고, 한 번 열심히 곡을 짜 맞춰보고 있었어요. 감정을 가득 담은 역작을 하나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기억이 납니다.
문제는 제 기대치가 너무 높았다는 거죠. 열심히 멜로디를 더하고 편곡을 해봐도, 그 음악은 제가 좋아하는 노래들에 비해 퀄리티가 한참 떨어졌습니다. 당연히 작곡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고, 미디 프로그램을 잘 다루지 못하기 때문이었어요. 하지만 저는 더 잘 하고 싶었고, 제 감정을 모두 담은 곡을 처음에 성공시키고 싶었습니다.
결국 작업은 두려워졌습니다. 현재 작업 상태와 제 목표 사이의 괴리감이 무서워, 결국 그 작곡 작업은 손에 잡히지 않았어요. 매번 작곡 작업 먼저 해야지 생각하다가도, 막상 시작하려고 할 때는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기더군요. 결국 저는 이 기간 동안 한 곡도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비슷한 시점에 저는 영상 제작을 시도했어요. 당시 유행하던 영상 중에는 ‘모션그래픽’이나 ‘타이포그래피’로 알려진, 일러스트와 자막, 작은 도형 이펙트 같은 요소만으로 이루어진 영상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영상을 정말 좋아했어요. 촬영본이나 3D 모델링도 필요 없어서 쉽게 만들 수 있었고, 이펙트 요소와 움직임만 잘 넣어준다면 특별하고 멋진 감성을 가지기 때문이었죠.
저는 예전부터 이런 영상을 꼭 한 번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나름 영상 편집은 다른 친구들보다 훨씬 자신 있는 분야인 만큼, 저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리고 코로나가 시작되기 조금 전에 저는 실제로 모션그래픽 영상을 처음 만들어봤습니다. Adobe를 학생 요금으로 결제하고, After Effects로 입자와 글씨를 움직이고 바꾸는 방법을 배웠죠. 단축키를 쓸 수 있을 정도로요.
이때 저는 제가 영상을 할 줄 안다는 친구의 추천에 의해 어떤 가벼운 동인 음악 팀에 잠깐 들어갔습니다. 그분들은 반 취미 반 전업으로 동인 음악을 만들고, 부르고, 음원을 믹싱하고, 일러스트를 그리고, 영상을 만들어서 유튜브에 올리는 분들이었어요. 이런 집단들은 주로 트위터나 네이버 밴드 등 인터넷에서 만나, 친목을 바탕으로 모였습니다. 그리고 유튜브 영상이 올라가는 것을 성과로 하여, 금전적 거래 없이 열정만으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어요.
저는 영상 편집자로서 몇 개의 영상 제작에 참여했어요. 하나의 영상을 만드는 데 처음에는 대략 30~40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결과물은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팀에서 받은 일러스트와 배경이 예쁘기도 했지만, 제가 조금 더 반짝이게 넣어본 효과라던가 움직임이 다른 ‘돈 받고 만든’ 영상들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어울렸어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점차 영상을 만들면서, 제작에 걸리는 시간은 20시간, 다시 15시간 정도로 줄어들었습니다. 확실히 같은 일을 반복하면 소요 시간도 감소하고 전체적인 퀄리티도 올라가는 것 같았어요. 이런 기술에 대한 개인의 능력치, 말하자면 ‘레벨’은 다른 선천적인 재능이 아니라 ‘경험의 양’에 크게 좌지우지된다는 것을 확실히 느꼈습니다. 뭐든 많이 하면 실력이 는다는 거에요. 그것도 돈을 벌 수 있을 정도로 말이죠.
2학기가 시작될 때쯤 저는 저처럼 영상 편집을 좋아한다는 후배 하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후배는 그 영상 편집 기술로 이미 돈을 벌고 있었다고 해요. 게다가 돈을 벌기 위한 영상 편집 기술의 레벨은 그렇게 높지 않았습니다. 당장 저도 몇 시간 연습만 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대신에 그 친구가 있던 시장 및 집단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했고, 곧 대입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제대로 시도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친구는 다른 사람의 리그 오브 레전드 게임 플레이 영상을 받아, 멋진 플레이 장면만 모아둔 영상(매드무비)을 만들어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고 해요. 상대방은 플레이 영상/기록과 함께 대략 5만원 정도의 돈을 주고 영상 제작을 맡기며, 영상이 나오면 그걸 유튜브에 올려 인기를 얻었습니다. 반면 이 친구는 몇 시간 정도의 편집 만으로 한 번에 5만원, 반복하면 몇 십만 원의 돈을 비교적 쉽게 받는 거에요. 그리고 똑같이 같은 작업을 반복하면 소요 시간이나 에너지도 크게 감소할 것이고, 곧 유의미한 수익이 잡힐 겁니다.
작곡과 영상 제작은 똑같이 제가 가지고 있던 목표였지만, 하나는 성공해서 성취감을 안겨주었고 하나는 공개조차 못하고 실패했습니다. 저는 정말 하고 싶었던 작곡은 결국 두려움에 건들지도 못 했지만, 그렇게 관심이 많지 않던 영상 편집은 제대로 해냈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 일은 결과를 내지도 못 하고 저를 더 우울하게 만들었습니다. 반면 조금 더 가벼운 생각과 자신감으로 시도한 일은 결과가 완벽하지 않아도 스스로에게 굉장한 성취감과 만족감을 가져다 줬어요. 두 과제에는 무슨 차이가 있었던 걸까요?
생각해보면 저는 이때까지 살면서 정말 많은 상상을 했습니다. 게임을 만드는 상상, 공군 기지 모델을 만드는 상상, 수제 전자제품을 파는 상상, 1인 방송으로 인기를 얻는 상상, 기타와 피아노를 잘 치는 상상, 잘생겨지는 상상, 작곡을 하고 유튜브에 올리는 상상, 상상만큼은 정말 다양했어요. 그리고 그런 상상을 할 때는 행복했습니다. 그 상상은 이루고 싶은 목표가 되었지만, 막상 그 목표를 이루지는 못했죠.
반면 해낸 일들도 몇 가지는 있습니다. 그런 목표를 가지고 시도했던 C 언어를 이용한 입출력, 탱크를 접고 전개도를 그려 만든 A4 사이즈의 기지 모델, 작은 비즈 장식품, 작은 1인 방송 채널, 아두이노 코딩과 온습도 센서 연결, 코드 정도는 잡을 수 있는 기타 실력 등등, 상상만큼 거대하지는 못했지만 인정받을 수는 있는 정도의 성과가 몇 가지 있었어요.
어떤 일은 되었고, 어떤 일은 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되는 과제와 안 되는 과제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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