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집을 벗어놓고 달아나던 매미도
가을을 벗기려고 안간 힘 쓰던 귀뚜리도
구석진 그늘에 안겨
목청 높이 우는 소리
울다 지친 고요와 어둠을 깔고 앉아
어깨 너머 시린 바람 새 봄을 불러와서
날밤을 지새웠구나
노란 꽃을 피우려고
❤❤❤ 생각주머니
“구석”은 일정한 진행이 일단 끝이 나는 곳이다. 더 나가려면 3차원 공간으로 튀어야만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이다. 수세에 몰린 자의 입장에서 보면 더 이상 도망갈 수도 없고 꼼짝없이 적에게 당해야 하는 마지막 피난처일 수도 있다. 작품에서 보면 “매미도” “귀뚜리도” 꽃씨 한 알도 구석에 몰려 있다.
그러나 ‘구석’은 수세에 몰린 약자가 마지막으로 있는 힘을 다해서 총공세를 펴는 최후의 저항선이기도 하다. 그래서 쥐를 잡으려는 고양이도 구석에서는 일단 조심해야 한다. 오히려 구석에 몰린 매미와 귀뚜리는 “구석진 그늘에 안겨” 숨을 고르고 “목청 높이” 소리를 지르며 마음을 추스르게 된다.
우리 속담에도 ‘믿는 구석’이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구석’의 의미는 ‘아무도 모르게 준비해 놓은 숨은 실력이나 특기’를 뜻한다. 구석에서는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정의’도 거듭되는 실망과 좌절을 맛본 후에야 비롯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구석의 힘”은 상상을 초월하는 괴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꽃씨 한 알도 이리저리 휩쓸려 쫒기다가 “울다 지친 고요와 어둠을 깔고 앉아”서야 겨우 “날밤을 지새”우는 결단 끝에 “노란 꽃”을 피우는 과정을 생각해 보면 역시 구석의 힘은 대단한 결과를 불러온다.
좌절과 낙담에 휩싸인 사람들아 당신이 처해있는 그 ‘구석’이 당신들의 최후 저항선이다. 있는 힘을 모두 모아 대항할 일만 남아 있다. 그 각오 앞에 무엇이 닥쳐온다 해도 두려울 것이 없다. 이것이 시인 김진희가 독자에게 건네는 메시지라 하겠다. (글 정용국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