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오는 날

by 박영선


첫눈이다.
좀처럼 보기 힘든 함박눈이 오후 늦게야 내려앉았다. 오전 내내 흐리던 하늘이 비를 뿌리더니, 어느 순간 그 비가 눈으로 바뀌었다. 창밖이 천천히 하얗게 변해갔다.

나는 눈이 오면 괜히 들뜬다. 강아지처럼 마음이 먼저 달려 나간다.


퇴근 후 차를 몰고 나오자, 와이퍼가 규칙적으로 눈송이를 밀어냈다. 차 안은 고요했다. 오랜만에 보는 그 장면이 반가웠다. 눈 오는 날이면 마음이 먼저 그 노래를 찾는다. 가로등이 하나둘 불을 밝히고, 스쳐가는 풍경은 점점 하얗게 번져갔다.


눈이 내리면 그리운 얼굴들이 떠오른다. 전하지 못한 말들이 마음속에서 부풀어 오른다. 첫눈 오는 날이면 잠시 길을 벗어나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오늘 하루쯤 내가 사라져도 아무 일 없을 것 같았다.

이대로 멀리 가버릴까.
누군가 나를 찾지 않는다면 나는 어디까지 갔을까.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잠시 방향을 틀어볼까 생각하던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남편이었다.

“어디야? 눈이 오는데 조심해서 와.”

짧은 한마디였지만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목소리는 나를 붙잡은 현실이었고, 동시에 나를 지켜준 울타리였다. 나는 다시 집으로 향하는 차선으로 핸들을 돌렸다. 신호등 앞에서 브레이크를 밟는 순간, 차가 길게 미끄러졌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앞에 차가 없었던 게 다행이었다. 그제야 내가 방금까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또렷해졌다.


낭만은 아름다웠지만, 나는 돌아가야 할 길 위에 서 있었다. 엉금엉금 속도를 줄이며 천천히 운전했다. 눈을 뒤집어쓴 차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평소보다 한참이 걸려 집에 도착했다.


지금은 모두가 잠든 밤. 창밖에는 고요한 설경이 펼쳐져 있다. 산 아래 산책로 가로등 아래, 눈 쌓인 벤치가 조용히 앉아 있다. 내일 아침이면 출근길이 또 걱정이 되겠지.


나는 가끔 철없는 여자가 된다. 첫눈 오는 날이면 잠시 길을 잃을 뻔하는 사람이다.

그래도 오늘도 나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 설렘이 있어 나는 아직 나를 잃지 않는다.

매거진의 이전글비움과 사유의 시간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