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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것들

6주 차~간결하게 글쓰기

by 박영선


문을 열자, 공기가 먼저 나를 멈춰 세웠다. 주인이 없는 집이라면 흔히 느껴지는 허전함 대신, 오래 정돈된 질서가 나를 맞았다. 식탁 위 유리컵은 깨끗했고, 행주는 모서리까지 반듯했다. 금방이라도 엄마가 안방에서 걸어 나올 듯했다.


냉장고를 열었다. 생선이 한 마리씩 키친타월에 단단히 감겨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포개진 비닐에는 손끝으로 매듭을 눌러 묶던 엄마의 습관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사위가 오면 구워주려고 준비해 두셨던 것들이다. 예전처럼 싱크대에서 물 흐르는 소리 위로, 생선을 닦던 손길이 떠올랐다. 묵묵하게 반복되던 그 움직임이 냉장고 안에서 오래된 기억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거실 한쪽에는 선풍기가 변함없이 서 있었다. 햇볕에 색이 조금 바랬을 뿐, 깨끗하게 유지된 몸체는 여전히 반듯했다. 어느 여름, 금이 간 날개를 붙잡고 부속품을 찾아봐야 한다며 걱정하시던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새로 사드릴게요. 엄마 때문에 경제가 안 돌아가요.”


내 말에 엄마는 짧게 웃고 고개를 저으셨다. 바람 세기가 약해질 때면 손잡이를 쥐고 아직은 괜찮다고 하시던 목소리. 오래 쓴 물건에 대한 정이 묻어 있었다. 애써준 시간에 감사하는 마음처럼 느껴졌다.


베란다 구석의 상자에는 젓갈 병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한 통만 가져가겠다는 내 말에, 나머지는 차곡차곡 모아두신 듯했다. 병마다 적힌 날짜는 조금씩 달랐고, 색은 시간에 따라 비슷하지만 미묘하게 변해 있었다. 뚜껑을 돌리는 순간 익숙한 향이 천천히 방 안으로 퍼졌다. 김장을 도울 때마다


“이건 조금 더 넣어야 한다”


고 하시던 목소리와, 무를 썰어 건네주시던 손끝의 온도가 함께 떠올랐다. 이제 남은 병은 몇 개 되지 않는다. 병을 열 때마다 시간이 잠시 되감기는 듯 조용히 파문이 일 뿐이었다.


엄마를 돌보던 요양보호사분도 장례식장에서 오래 울었다. 돌본 게 아니라, 오히려 엄마에게 많은 정을 받았다며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생일이라고 건네받았던 작은 편지와 선물 이야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절약하며 사셨지만, 마음을 건넬 자리에서는 언제나 망설임이 없던 분이었다.


살면서 선택의 갈림길에 설 때면 나는 지금도 엄마를 떠올린다. 이럴 때 엄마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엄마는 조언을 길게 남기신 적은 없었다. 대신 묵묵히 해 내던 일상의 태도를 길처럼 보여 주셨다. 결정을 서두르지 않고 한 걸음 멈춰 바라보던 시선. 그 침묵이 내겐 오래된 지도처럼 남아 있다.


요즘도 마음이 흔들릴 때면 부엌에서 등을 보이며 설거지하던 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저 제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해내던 그 움직임. 그 등은 지금도 내 앞에서 방향을 조금씩 틀어주고 있다.


엄마는 내 삶을 잡아주는 보이지 않는 나침반처럼, 내가 머뭇거릴 때마다 조용히 지켜보고 계시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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