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여름의 끝 무렵 무거운 공기 사이로 선선한 바람을 느낀 저녁이었다. 올해 여름은 유독 길었다. 가을이란 게 주는 감각마저 흐릿한데 간만에 상쾌한 바람 한 줄기가 반가웠다. 나는 친구와 술 약속이 있어 오랜만에 외출을 감행했다. 우리는 동네 이자카야에서 칸예 웨스트의 내한 공연 이야기를 시작으로 왜 해외 가수가 내한하기 어려운지 논하고 퍼펙트 데이즈의 감상에 대해 떠들었다. 잡담을 나누던 중 브런치 스토리가 화두에 올랐다. 그는 몇몇 글을 살펴보니 몇 살에 무슨 병을 진단받고 뭘 시작했다는 유형의 글이 많더라고 말했다. 그런 글을 꽤 본 것 같아 동의했고 그럼 난 25살에 조울증을 진단받았고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다는 글을 쓰리라 농담조로 말했다.
사실 조울증을 진단받고 시작해 본 일이 몇 가지 있지만 해결 가까이도 못 갔다. 그래서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은 거나 크게 다를 바 없다. 시도의 끝에 성취가 없는 게 아무것도 안 한 것보단 낫지만 어쨌든 해결하지 못했다. 해결이라는 단어를 반복하는 이유는 슬슬 지긋지긋하기 때문이다. 도전과 실패를 반복한 결과는 인생에 마스터키는 없다는 교훈뿐이다. 저 사람은 뭔가 알고 있을 것 같았고, 어떤 영화나 책에 정답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이 병을 해결할 수 있는 단서를 못 잡았다.
몇 주간 운동을 꾸준히 했고, 기분도 괜찮아지다가 또 며칠 뒤에는 자살 사고를 했다. 자살 사고는 자석과도 같이 나를 당겼다. 내 머리가 이런저런 주제들에 아무리 가까이 가려해도 자살 사고라는 자석이 나를 끄는 힘이 더 셌다. 어떤 날은 상세한 계획이 필요할 것 같아 건물 옥상이나 한강 다리 같은 곳을 찾아 동선을 짰다. 몇 시에 시도해야 사람과 마주쳐 방해받을 확률이 적은가, 언제 일을 벌여야지 다른 사람이 죽어가는 날 살리지 않을까 고민했다. 그러다 스스로가 섬찟해지면 정말 일을 벌일까 싶어 뒷걸음질 쳤다.
살다 보면 그냥 하는 일이 있다. 나한테는 글쓰기가 그런 일이다. 뭔가 생각나면 핸드폰 메모장을 켜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말을 적는다. 그게 며칠 반복되면 글 하나 정도 완성할 분량이 쌓인다. 그러면 글을 쓴다. 그래서 이걸 쓴다. 블로그는 만들어 본 적도 없고 SNS는 스물 이후 한 적이 없다. 공개된 장소에 내 글이 오른 건 학창 시절 교내 신문이 마지막이다. 그러면서도 이걸 쓰고 공개하는 이유를 나도 모르겠다. 자가 치유가 목적이면 혼자 간직해도 될 것을. 경험상 뭘 알고 시작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다가 행동 기저의 무언가를 발견하면 운이 좋은 것이다. 나는 맨 정신으론 떠올리기도 싫은 이 기억을 왜 쓰는 걸까. 그런 마음이 들면서도 운이 좋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