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심리학을 전공한 고등학교 선배와 오랜만에 만났다. 선배는 상담 교사가 되려 공부 중이었고 나는 중요한 시험을 앞둔 상태였다. 대화의 맥락이 잘 생각나진 않는데 상담 예약을 하지 않고 방문해도 진료가 가능한 병원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당시 나는 몇 달간 자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고 정신병이 있나 의심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맨 정신일 땐 자살하지 않을 건데 왜 이런 생각을 하지 싶었고 조금만 신경 쓰지 않으면 자살 계획을 짜고 있는 이상한 상태였다. 유튜브로 우울한 분위기의 곡만 반복 재생했는데 그러면 자살 방지 문구가 뜬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2021년 10월 10일. 병원에 처음 간 날이다. 이날을 기억하는 이유는 포털 사이트를 켰더니 자살 방지 문구가 뜨길래 알고리즘에 간파당한 것만 같아 놀랐는데 알고 보니 그냥 정신건강의 날이라서 그런 거였다. 선배에게 연락해 바로 진료가 가능한 병원의 이름을 물었다. 가까운 위치라 곧장 갔는데, 막상 가놓고 문을 못 열겠더라. 그래서 병원 근처 카페에 자리를 잡고 담배만 연거푸 태웠다. 거기서 멜로가 체질의 은정이 친구들에게 힘들다, 안아달라 하는 장면을 봤다. 나도 저럴 수 있을까, 다시 삶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 생각했다.
결국 용기를 내어 마주했다기보단 눈 감고 저지르는 기분으로 병원문을 열었다. 생각보다 별거 없었다. 다른 병원과 마찬가지로 접수하고 의자에 앉아 자신의 차례가 될 때까지 대기했다. 차이가 있다면 다른 병원에 비해 사람이 적고 더 조용하다는 것과 심리 검사를 한다는 것. 3년 전 기억이라 검사가 먼저였는지 진료가 먼저였는진 생각나지 않는다. 검사는 어릴 적 학교에서 해본 심리 검사와 비슷했던 것 같다.
진료의 경우, 대중매체를 통해 본 정신과 상담에서는 우는 모습도 종종 보였던 것 같은데 나는 덤덤한 말투로 상태를 이야기했다. 술자리에서 자살 계획을 짜고 있다느니, 중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목을 졸라봤다니 얘기하면 분위기는 박살 나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어쩔 줄 몰라할 것이다. 반면, 선생님은 담담했다. 별 반응이 없으니까 말하기 편하더라. 생각이 나더라도 절대 실행에 옮기면 안 된다는 말을 제외하곤 무슨 말이 오갔는지 까먹었다. 내가 다니는 정신과는 약 처방도 병원에서 해주기에 약국을 들를 필요가 없어 편하다.
환자라서 다행이다. 병원 문을 닫고 나오며 혼자 생각했다. 평생 불행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이 병만 나으면 되겠다, 나으면 이런 감정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만약 내가 환자가 아니었다면 평생 감정에 잠식된 채 살아야 할 텐데, 그게 아니라서 다행이라 여겼던 거다. 물론 그때는 내 병명이 조울증인지 몰랐고, 생애 평균적으로 26번 재발하는 것도 몰랐다. 괜히 약을 끊었다가 악화할 수 있어 약을 계속 먹어야 하는 것도 몰랐다. 그렇지만 그때는 분명히 환자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는 문구가 있다. 그걸 쓴 사람의 의도는 잘 알겠다. 하지만 의도니 뭐니 하는 걸 배제하고 저 문구를 보면 그냥 쌩구라다. 이런 병을 달고 사는 입장에서 이 병은 늪지대 같다. 발버둥 치지만 더욱 깊숙이 빨려 들어갈 뿐이다. 그래서 지인들에게 정신병이 의심되면 바로 병원에 가라고 한다. 아예 처음부터 들어오지 말라고 한다. 어찌 보면 감기는 병원에 안 가도 자연 치유될 때가 있다. 그런데 정신병은? 감기에 걸렸을 때 심해지기 전에 병원에 가듯이 정신적으로 힘들 때 곧바로 정신병원에 갔으면 한다. 물론 문턱이 높긴 하다. 나도 정신과에 처음 방문하는데 몇 주의 시간이 필요했고, 부모님께 정신병을 말씀드릴 때까지 1년 반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문턱을 넘었다고 상황이 극적으로 반전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비교적 살만하다. 병원에 가며 느끼는 살만함이 문턱을 넘을 때 필요한 용기보단 더 크다. 최소한 나는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