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4학년, 유치원 졸업 후 이사해 타지의 초등학교에 입학한 걸 전학으로 치면 두 번째고 아니라고 치면 첫 번째 전학이 있었다. 새로운 동네는 반지하여도 분당이었던 예전 동네와 사뭇 달랐다. 요즘 아파트처럼 고급진 이름이 아니라 장미나 개나리 같은 꽃 이름이 붙은 아파트가 즐비했다. 건물들은 70~80년대에 지어져 다 낡아 쓰러질 것 같았다. 대형마트 대신 시장이 있었고 프랜차이즈 빵집이나 메이저 서점 대신 동네 빵집과 서점이 있었다. 뜬금없이 우뚝 선 오피스텔 하나를 제외하곤 높다고 느껴지는 건물조차 없었다.
전학 후 처음 사귄 친구 A는 학년 짱이었다. 그의 형도 학교에서 일진 노릇을 했다. 집에는 이걸로 사람을 때려도 되나 싶을 정도로 큰 몽둥이가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친구 A는 폭력에 노출된 아동기를 보냈을 것이다. 친구 A는 센 주먹에 비해 나름 순수했다. 또래 친구들과 비슷하게 학교가 끝나면 놀이터에서 놀다가 학교에 갔고 간식으로 분식을 사 먹었다. 그나마 한다는 일탈은 가파른 비탈길에서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자전거를 타는 일뿐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다른 아이들이 동네 형들에게 삥을 뜯길 때 그는 형들에게 애들 돈 뺏지 말라고 한마디 할 수 있다는 것 정도가 달랐다.
새로운 환경에 제법 적응했을 무렵, 친구 A가 다른 친구들을 대하는 태도가 변했다. 자기 말을 듣지 않았단 이유로 폭력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행동은 때렸다기보단 팼다에 더 가까웠다. 사람이 피가 날 때까지 맞는 걸 그때 처음 봤다. 친해서인지 나를 건드리는 일은 없었다만 폭력이 두려워서 한 명씩 자신의 곁을 떠나자 결국 나한테까지 순번이 돌아왔다. 다행인 건 내가 그 사실을 빨리 어른들에게 알렸단 것 정도다. 형식적인 선생님과의 면담, 친구 A의 부모님의 사과를 끝으로 서로를 공기 취급하는 사이가 됐다.
1년 뒤 사정이 나아진 우리 집은 더 좋은 동네로 이사를 준비했다. 전학 간다는 이야기가 친구들 사이에 퍼졌을 때, 친구 A가 말을 걸어왔다. 그는 집에 같이 가자고 말했다. 그의 눈빛은 잘 나가는 학년 짱의 눈빛이 아니라 부모님께 된통 혼나기라도 한 풀 죽은 아이의 눈빛이었다. 함께 하교하며 핸드폰 번호를 알려달란 걸 거절한 것을 끝으로 그와의 관계는 완전히 끝났다. 친구 A가 주위의 폭력에 노출된 것이 문제였다면 방치를 당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매일 구멍 난 똑같은 옷을 입고 학교에 온다거나 비듬이나 버짐을 달고 학교에 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학교에선 눈에 띄지 않는다. 가만히 있다가 조용히 피시방으로 사라진다. 밤 10시가 되면 집에 들어가 조용히 잠이 든다. 그런 날들이 반복된다.
이 기억을 오랜 시간 잊고 살았다. 몇 년 만에 이때를 떠올린 건 재수학원에서다. 나는 대표적인 사교육 특구 중 한 곳의 재수학원에 다녔다. 재수생의 행색은 대개 초라하지만 여기는 달랐다. 괜찮은 브랜드에서 나온 고가의 추리닝이나 우영미, 팔라스, 슈프림 등 유명 브랜드의 옷을 입은 학생이 많았다. 당연히 숫자로 따지면 그렇지 않은 학생이 더 많았지만. 저 옷 몇 벌 살 돈이 어릴 때 있었더라면 그 아이들이 좀 달랐을까. 생각은 꼬리를 물어 그 아이들이 제대로 사랑받고 자라 제대로 사랑을 나눌 줄 아는 부모의 밑에서 자랐다면 어땠을까 떠올렸다.
아마도 그들이 잘 나가는 어른이 되진 못했을 거다. 그 동네에서 탈출한 건 나뿐이다. 가난은 죄가 아니라지만 정작 가난한 상황에 부닥치면 벌을 받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싶다. 밑바닥 쳤다고 느끼고 얼마 안 가 더 깊은 바닥에 처박힌다. 그런 상황에서 가난은 죄가 아니라는 소리를 들으면 죄를 지은 게 아닌데 왜 벌을 받아야 하는지 떠오를 뿐이다. 11살짜리 어린애로 내 기억에 남은 그들은 죄가 없다. 자기 잘못을 근거로 어려운 상황에 놓이면 당장은 괜찮지 못해도 시간이 지나면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을 탓할 수도, 자신을 낳은 부모를 탓할 수도 없는 상황이면 대체 어떡하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