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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현 Mar 26. 2024

07. 출가의 삶은 적성에 딱 맞습니다.

어디 내놓아도 잘 살 줄은 알았지만, 잘 살아도 너무 잘 산다.

제주에 정착한 지 어느덧 7개월이 되었다.

제주에 살고 있다는 말은 살 집을 구했다는 의미.

막막했던 집 구하기도 다 운명이 있고 때가 있었던 건지 갑작스레 올라온 집 하나가 마음에 퍽 마음에 들어 집을 보자마자 계약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제주 집을 방문하며 100이면 100 집을 잘 구했다고 한다.

기다린 보람이 있다.


동네도 내가 딱 원한 동네다. 있을 건 있고, 없을 건 없는 그런 동네.

이후 알게 된 많은 도민 지인들이 왜 그 동네에 사냐, 왜 그 먼 곳에 사냐라고 하지만

주차걱정 없고, 석양이 예쁘고, 서귀포와 제주시가 둘 다 가깝고 사람이 없고, 동네 맛집이 많은 우리 동네가 좋다. 장점이 이렇게나 많은데.

산책을 하면 한라산이 보이고, 출근길은 귤밭이 보이며, 분리수거를 하러 가는 길 밤은 한치배가 저 너머로 보인다. (이후 알게 된 사실은 한라산과 바다와 귤밭이 안 보이는 제주지역은 없다는 것...)

그래서 찰나의 작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기회들이 많다.


집을 출가하여 살아간 경험은 많지만 온전히 나 혼자만의 공간은 처음이다.

그래서인가 나도 나라는 사람과 동거를 하며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생각보다 내가 깔끔하다는 것. 물건을 많이 두는 것을 싫어하는 것. 꽤나 좀 야무지다는 것.

집을 놀러 온 엄마가 배신감이 든단다. 이렇게 깨끗하게 살 줄 알았으면 진작 집에서나 이렇게 살지.

자기 집이라고 이렇게 깔끔 떠는 것 좀 봐라-


집은 요즘 유행하는 모던 미드센츄리 갬성, 우드와 베이직한 감성을 담은 따뜻하고도 포근한 무드...

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

필요한 물건들만 있고,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요소들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곳곳에는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추억으로 가득한 폴라로이드 사진과 향을 좋아해 곳곳에 둔 디퓨저, 라탄공예 수업에서 직접 만든 무드등도 놓여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너도 그렇다 콘셉트로 꾸며진 집이다.

물건 하나하나가 나를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아 버릴 것 없이 소중하다.


독립생활은 이전부터 나 자신과 친해서인지 집에서 나와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꽤 익숙하고 자연스럽다.

자발적 외톨이 생활이 적성에 맞다. 사실 천직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시간적, 심리적 여유가 생기니 하고 싶은 것도 배우고 싶은 것도 많이 생겼다.

공부해보고 싶던 세계사 공부도 시작하고, 비즈도 만들고, 책도 많이 읽었다.

멈췄던 글도 조금씩 다시 쓰고 있고, 일기도 이번 연도부터는 새로이 채워나가고 있다.

밥도 너무 잘 챙겨 먹는다. 날 좋은 날은 돗자리 하나 챙겨 자전거를 타고 나간다.



어디 내놓아도 잘 살 줄은 알았지만, 잘 살아도 너무 잘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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