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고 귀신

귀신들린원고

by allen rabbit

퇴고가 이상하게 변하고 있다. 퇴고가 일상인 직업군이라 그런가 보다 할 수 있지만. 요즘 글 쓰기는 이상하다. 퇴고를 하다 보면 완전히 다른 차원에 던져진 기분이 된다.

며칠 전 겨우 2페이지도 안 되는 기획서를 쓸 때였다. 일단 내용을 다 써 놓고 보니 말이 너무 안돼서 전체적으로 고쳤다. 다시 쓰고 한 퇴고는 평범했다. 문장 호응이 잘못된 부분을 고치고, 문단의 순서를 바꿔주고 하는 거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부터였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뭔가 문장이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꼭 문장이 아프다고 잔뜩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다. 한참을 궁리하다가 보니 문장이 모두 관념적인 말로만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문장을 다시 한번 고쳐 썼다. 그렇게 하고 나니 이번엔 다시 문장 호응이 안되고, 문단의 순서도 이상해졌다. 그걸 다시 퇴고하고 보니 이번엔 문장이 배를 까고 게으르게 뒹굴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얘 왜 이래? 꼭 내가 아는 글이 아닌 것(?) 같다고 할까?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번엔 처음 의도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글의 내용이 진행된다는 걸 알게 됐다. 다시 글을 고친다...


그렇게 나는 꼭 마(魔)가 씐 것처럼 하루 종일 퇴고를 했다. 기획서를 자주 쓰는 편이 아니라서 그렇다 쳐도 고작 2페이지를 가지고 하루 종일 퇴고를 하고 있었다는 건 정도가 심하다. 너무 한심한 일이었다. 그래도 글 쓰는 게 내 일인데!


퇴고는 당나라의 어느 시인이 시의 한 구절을 밀 퇴(推)로 할까 두드릴 고(敲)로 할 것인가 고민한 데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하지만 내가 하는 퇴고는 적당한 말로 고쳐 쓰는 정도가 아니었다. 내 글의 잘못된 문장이 꼭 골절되고 멍든 것처럼 보였다. 엉뚱한 부분들을 잘못 꿰매어 놓은 것 같았다. 그런 문장들이 아프다고 소리 없이 아우성치는 것 같았다.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다. 꼭 부서질 듯 가냘픈 여자 친구가 까닭 없이 우는 것처럼. 그래서 여자 친구에게 묻는다. 왜? 무슨 일이야? 아파. 어디가? 여기저기. 아, 그럼 시점을 바꿔볼게. 어때? 아니야. 아직 아파. 그럼 시제를 바꿔볼게. 어때? 아니야. 좀 웃기게 써볼게 어때? 아니야. 그럼 내 사례를 넣어볼게. 어때? 아니야. 그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파. 아프다고!


헉! 퇴고할 때면 원고가 내게 말을 한다! 분명히 말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외면하지 못하고 눈이 빠져라 퇴고를 했다. 하루 종일 A4지 두 장과 뒹굴고 자빠지고 난리 법석을 떨었다.


원고가 말을 건다고 생각하다니. 혹시 내가 아픈 건 아닐까? 퇴고도 병이 되는 걸까?


지금 이 글도 몇 번씩이나 고치고 앉아있다. 심부름 다녀와서 고치고, 밥 먹고 다시 앉아 고치고... 이게 뭐라고. 그리고도 또 이따가 다시 고칠 거다. 틀림없다. 왜냐고?


얘가 나한테 말을 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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