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아 페레즈 Emilia perez

2025. 3. 19

by allen rabb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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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의 나는 무색무취하다. 게다가 작년부터는 일이 하나도 없다. 그렇다고 뭘 하고 싶은 의욕도 나지 않는다.

짜증이 좀 늘었다. 하릴없는 나를 어떻게 알아차린다고, 행여나 식당에서 주문할 때 나만 늦게 가져다주나 신경이 곤두선다. 10년 전, 20년 전이라면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과 핏대를 높이며 싸우고, 상대의 자그마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소리를 지르거나, 행패를 부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그때와 다른 사람일까?

요즘 나는 그게 궁금했다. 그때는 나고, 지금은 내가 아닐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에밀리아 페레즈>의 첫 화면은 낡은 스피커의 클로즈업이다. 세탁기, 냉장고, 전자레인지를 산다는 가전제품 수거 차량이 멕시코의 밤거리를 지나간다. 냉장고 삽니다. 세탁기 삽니다.

“삽니다.”


이렇게 수거된 오래된 냉장고는 처음에 살 때 치른 값을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싼값에 팔려 갈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이 냉장고는 수리되어 다시 새로운 집에서 새로운 가족의 식사를 담당하게 될 거다. 비록 값은 달라졌지만, 여전히 냉장고는 냉장고다.


아내를 살해한 남편을 변호해서 무죄로 만드는 변호사 리타. 그녀는 큰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낯선 전화를 받는다. 이곳은 멕시코. 길거리에서 버젓이 살인이 자행되는 곳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상황이 지긋지긋했다. 부자들의 거짓과 위선을 도와야 하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싶고, 자기 회사도 차리고 싶다. 리타는 말한다.

“이 검은 피부를 바꾼다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리타는 두려움을 누르고 약속 장소로 나간다. 그리고 낯선 남자들에 의해 납치된다. 그녀를 납치한 자는 멕시코 카르텔의 수장 ‘델 몬테’. 그는 리타에게 자신을 여자로 만들어달라고 말한다.

“내 말을 들으면, 받아들이는 거야.”


리타는 델 몬테의 지시대로 성전환 수술을 할 수 있는 의사들을 찾아다닌다. 그 사이 그녀는 델 몬테의 카드로 쇼핑을 하다가 위협을 당하기도 한다. 나는 언뜻 그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위험을 자초하는 걸까? 하지만 그녀는 변하고 싶었고, 그래서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고 약속 장소로 나갔고, 무시무시한 카르텔 수장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변화를 맛보고 싶었던 그녀가 카르텔의 카드로 사고 싶은 물건을 산 것은 자연스러운 욕망의 실현이 아닐까? 그것이 위험을 자초할지라도. 그건 델 몬테도 마찬가지다. 그가 여자로 변하면 자신은 물론이고 자신을 둘러싼 주변도 모두 변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이 가진 소중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리타는 그저 모습만 여성으로 변하고자 하는 환자에게는 수술해 줄 수 없다는 의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성이 변하면, 사람이 변하고, 주변이 변하고, 사회가 변하고, 세상이 변한다.”

의사는 직접 델 몬테를 만나기로 한다.


델 몬테는 의사에게 자신이 돼지우리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 많이 죽이고 더 잔인해져야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신은 항상 여자가 되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을 살면서 언젠가는 단 한 번만이라도 자기 자신으로 살고 싶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무엇인가가 되고 싶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나도 무엇인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많은 이가 그렇듯 그렇게 되지 못했다. 어쩌면 나는 진정으로 나 자신이 어떻게 살기 바랐는지 몰랐던 것은 아닐까?


델 몬테는 사막에 누워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별을 바라본다. 떨어지는 별똥별을 바라본다. 이제 곧 델 몬테는 여자가 되어 사랑하는 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이 모든 일이 완료되고, 리타는 델 몬테의 전화를 받는다.

“이제 너는 부자야.”

카르텔의 일을 한다는 것은 언제 죽을 지 모를 일이었다. 이제 마침내 끝났고 그녀는 부자가 됐다. 리타는 안도감과 뒤늦게 몰려오는 공포에 흐느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야.”

4년 뒤 영국에서 일하는 리타는 완전히 여자로 변해 버린 델 몬테를 만난다. 리타는 공포와 원망이 섞인 목소리로 묻는다. 왜 내 앞에 나타났느냐고. 이제 에밀리아 페레즈가 된 델 몬테는 자기 가족을 다시 멕시코로 불러달라고 부탁한다.


자신을 델 몬테의 사촌 형제라고 속이고 에밀리아 페레즈는 아이들의 고모가 되어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우연히 카르텔에 희생된 행방불명자를 찾는 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그 일에서 기쁨을 느낀다.


너무나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그녀는 남자였던 시절 자신이 죽이고 파묻어 버렸을지 모를 행방불명자들을 찾는 일에서 보람을 찾은 것이다. 델 몬테였던 시절 돼지우리에서는 더욱 잔인해지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에밀리아 페레즈가 되어서는 자신이 파묻은 시신을 찾아 가족들에게 돌려주려 애쓴다. 과연 한 사람이 이토록 이율배반적이고, 모순된 일을 해도 되는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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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이런 모순들로 가득 차 있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은 성을 바꾸고, 성이 바뀌자 사는 곳이 달라지고, 사는 곳이 달라지자 관계도 변한다. 리타가 성형외과 의사 앞에서 한 말 그대로다.


어느 날 자선파티장에서 리타는 장관들과 유명 인사들의 시커먼 속내와 그들이 감추고 있는 진실을 폭로하며 비난하는 노래를 부른다. 고고한 척하지만 돈을 받고 소아성애자를 풀어주는 판사. 카르텔의 비호를 받고 주지사가 된 정치가…. 하지만 리타는 어떤가? 그녀 역시 비난받아 마땅한 위선자 아닌가? 그녀는 수많은 사람을 죽인 멕시코 최고 카르텔의 일을 하고 부자가 되었다. 그가 여자가 된 뒤에는 실종자를 찾는 일을 도우면서 리타 역시 유명해진다. 그렇다면 그녀 역시 위선적인 것 아닐까?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이런 말일까?


하지만 <에밀리아 페레즈>는 조금 다른 면에서 삶을 바라본다. 우리 삶의 조건은 주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스스로 만들어 내기도 한다. 마침 어떤 조건이 갖추어졌다거나, 또는 온 힘을 다해 스스로 조건을 바꾼 뒤에도 그러나 삶은 늘 만족스럽지 못한 법이다. 리타가 카르텔의 카드를 가지고 조마조마한 쇼핑을 하는 것도, 또 가족을 버리고 성까지 바꾸면서 그토록 힘들게 에밀리아 페레즈로 변해 탈출한 그가 카르텔이 죽인 실종자를 찾는 일에 뛰어드는 것도, 모두 당장의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고 변하고 싶은 마음에 벌어지는 일이다.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는 말한다. 그때 다르고 지금도 다르다고,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고.

그러니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전혀 다르다 해도 위선이 아니라고. 그래도 괜찮다고. 그때도 맞고 지금도 맞다고. 그저 우리는 주어진 현실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일 뿐이라고. 그것이 바로 삶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멕시코의 돼지우리에서 태어났다면 비참한 희생자가 되었을까? 아니면 살아남기 위해 델 몬테처럼 잔혹해졌을까? 그래서 만일 멕시코의 카르텔에서 벗어났다면 나는 무엇을 했을까?


나는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를 보는 내내 영화 속의 모든 인물이 너무나 가슴 아프고 사랑스러웠다. 그들은 때로 의리를 지키기 위해 몇 년이나 숨을 죽이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터무니없는 욕심을 부리기도 한다. 그것이 모두 우리 삶의 모습이 아닌가. 비록 그 속에 파국의 씨앗이 뿌려진다 하더라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20년 전과 나는 많이 달라졌지만, 어쩌면 아주 형편없어졌는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틀림없는 나다. 나도 나의 현재의 조건에서 분투하고 있을 뿐이다. 무엇인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지만 이것이 나이고 내 삶이 아닐까. <에밀리아 페레즈>는 글쓰기를 놓아버린 나를 키보드 앞에 다시 앉혔다. 낡고 이미 한번 버려졌다 해도 다시 다른 집에 갈 기회만 생긴다면, 냉장고는 여전히 냉장고다. 다시 그 소리가 들리면 나는 달려 나갈지도 모르겠다.

“삽니다.”


에밀리아 페레즈는 실종자를 찾는 자원봉사 활동을 펼친다. 이일은 그녀에게 삶의 환희를 준다. 이곳에서 에밀리아는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된다. 고단한 삶을 지나온 에밀리아 페레즈는 처음으로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에밀리아는 사랑하는 여인에게 속삭인다.

“욕망하지 않는 삶은 끝없이 가파른 산길일 뿐.”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는 로그 라인을 읽었을 때 코미디인 줄 알았다. 카르텔의 수장이 여자가 되고 싶다니! 포스터에 새빨간 양복을 입고 우스꽝스러운 춤 자세를 한 조이 샐다냐를 보고 더욱 확신했었다. 개코미디네. 하지만 이 영화는 내 인생의 영화가 되고 말았다.


뮤지컬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시카고>든 <사랑은 비를 타고>든, 아니면 그 유명한 고양이 똥꼬 <캣츠>든. 그 과장된 제스처와 잔뜩 흥분된 노래 스타일은 나와 잘 맞지 않았다. 하지만 <에밀리아 페레즈>는 순식간에 영어보다 스페인어가 훨씬 노래에 어울리는 언어라고 각인될 정도로 좋았다. 특히 포스터에 있는 문제의 새빨간 양복을 입고 노래하고 춤추는 조이 샐다냐의 그 장면은 정말 압도적이었다.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영화의 전개는 내 최애 중 하나인 <예언자>를 만든 감독 자크 오디아르다웠다. 이제 70이 되었다는 이 감독은 삶에 대한 더 깊고 울림 있는 이야기를 세상에 들고나왔다.


배우들의 멕시코식 스페인어 발음이 논란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내게는 그저 외국어일 뿐이다. 내게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 분명히 이 <에밀리아 페레즈>는 내 영혼을 흔들었고, 나는 기회가 나기만 하면 몇 번이고 다시 이 영화를 볼 것이다. 그리고 이제 내 욕망의 정체를 쫓아 보려한다. "욕망하지 않는 삶은 끝없이 가파른 산길일뿐" 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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