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 17 Mickey17

2025. 4. 8

by allen rabbit


미키는 expendable이라 부르는 복제 인간이다. 소모품 인간. 영화에서는 이 복제 인간이 처음 발명됐을 때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부분이 잠시 나온다. 복제 인간의 개발자 중 하나가 복제 인간을 이용해 연쇄 살인을 저질러 문제가 된 것이다. 이것이 복제 인간을 문제가 있는 존재로 보이게 만든다. 정치인 마샬은 새 행성을 개척하러 가는 동안 한시적으로 사용하고, 그마저도 만일 멀티플이 발생하면 모조리 말소하겠다는 조건으로 허락받는다. 그리고 아마 이때부터 복제 인간을 소모품, 익스팬더블이라고 부르게 됐으리라.


결국 외계 행성으로 향하는 승무원들뿐 아니라 관객들도 미키가 16번을 죽는 모습을 지켜보며 크게 문제 삼지 않는 태도가 만들어진다. 이게 문제로 보이지 않는 것은 복제 인간이 어쩌면 위험할 수 있는 존재라 그저 소모품으로 쓰고 버리는 존재가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첫 복제 인간의 연쇄 살인을 예로 들었기 때문에 생긴 착각이지 복제 인간 자체의 문제는 아니다. 18번의 미키 중 연쇄 살인범은 없다. 그리고 미키는 그냥 재생된 사람일 뿐이다. 소모품이 아니다.


감독은 이 부분이 아이러니가 되기를 원했는지, 아니면 그냥 감독의 장기인 위악적인 요소를 코믹하게 비틀려 했는지 궁금하다. 설득이 잘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깊은 뜻을 나같은 미천한 익스펜더블 작가가 알 리가 없다.


이 영화에는 이런 상징과 아이러니한 비틀기가 곳곳에 있다. 외계 바이러스 항체를 만들기 위해 모르모트로 사용되는 미키. 여자친구 나샤는 바이러스 쳄버에 들어가 죽어가는 그를 안는다. 이 장면의 구도는 영락없는 피에타다. (나는 그녀가 방호복은 다 잘 갖춰 입고 장갑은 왜 안 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이유가 있겠지)


또 미키는 나샤를 처음부터 정성스레 옷을 입혀주고 신발을 신겨준다. 이것은 그녀가 성스러운 존재이고 미키는 그 존재를 알아본다는 뜻이다. 이 장면의 구도도 어느 성화(聖畫)에서 본 듯한 익숙한 구도다.


독재자 마샬은 외계 행성의 원주민을 크리퍼라고 명명한다. 반면 미키 17은 영화가 끝나고서야 비로소 제 이름을 찾는다. 무엇인가에 이름을 부여할 수 있는 권력과 제 이름조차 제대로 불리지 못하는 미천한 자의 차이다. 우리는 현실에서 마샬 같은 독재자를 세계 곳곳에서 목격하곤 한다. 그리고 이 영화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미키 자신이다. 돈을 갚지 않는 사람을 재미 삼아 토막 내는 대부업자가 있다. 미키는 죽지 않으려고 그에게서 달아나다가 결국 기꺼이 죽어야 하는 일이 직업이 된다. 죽음을 피하려다 죽어야 하는 직업을 갖는다니.


영화 후반에 이르기 전까지는 이 세계가 마샬의 완전 독재 체제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영화 후반에 갑자기 보안팀장이 청문회에 제출하겠다면서 마샬 부부의 행위를 촬영하라고 지시한다. 아니, 삼권분립 체제였어? 이 대사에 깜짝 놀란 나는 도리어 맥을 놓고 말았다.


외계 행성으로 가는 4년의 항해 동안 마샬은 수많은 승무원의 광적인 지지를 받는다. 이렇게 인기 있는 마샬이 없어진 세계가 너무나 쉽게 정리가 되는 영화 후반 과정은 뭔가 빠져 있는 느낌이다. 사실 영화 후반부의 이 설정만으로도 영화 몇 편은 거뜬히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미키가 크리퍼와 동화되어 인간과 싸우는 <미키 17, 크리퍼와 춤을 (늑대와 춤을)> 혹은 <아바타미키 (아바타)>. 또는 평화로워진 이 행성에 더 끔찍한 외계인이 착륙했다. <에어리언 VS 크리퍼 (에어리언 VS 프레데터)> 등등. 그러나 나는 궁금하다. 이렇게 후반을 서둘러 정리한 것이 어쩔 수 없는 감독의 선택인지, 아니면 원작의 영향인지.


그리고 한 가지 더. 지구인들은 과연 저렇게 끔찍하게 생긴 외계 생명체 크리퍼와 공생할 마음을 쉽게 가질 수 있을까? 아무리 번역기가 생겼다고 상대를 금방 이해할 수 있을까? 이 과정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스타쉽 크리퍼즈 (스타쉽 트루퍼즈)>가 한 편이 나올 판이다. 그래서 크리퍼는 이 행성의 원주민이고 인간이 침략자라는 나샤의 주장은 갑작스럽다. 왜냐하면 이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은 심지어 인간이자 말도 통하는 미키가 죽는 걸 낄낄대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넌 죽는 게 니 일이야.” 마찬가지로 크리퍼에게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린 여기서 살려고 왔어. 그러니 너희들은 죽어.” 아무래도 이 세계에서는 이편이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때문에 영화의 후반이 급격하게 마무리 되는 느낌은 아쉽다. 만일 이 영화의 시작과 끝을 과격하게 줄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미키는 이주민 중 가장 미천한 처지지만 자신을 희생하면서 외계 행성의 원주민과 평화로운 공생을 이룩한다.” 그런데 어떻게? 그 과정이 과연 고개를 끄덕이게 되나? 아니다. 나는 질문만 더 많아질 뿐이다.


영화가 촘촘하지 않아 보인다고 내가 이 영화와 “승부”를 보려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는 과연 거론해야 할 텍스트가 그저 “승부”를 보기보다 훨씬 많은 것뿐이다. 왜 아니겠는가? 비판하듯 주절대는 것은 그저 내가 열등한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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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어떤 장면에서 나는 감독이 한국인이라는 걸 나만 알아본 것 같아 기뻤다. 소스에 미쳐있는 독재자의 아내는 바닥에 떨어진 소스를 미키에게 맛보라고 한다. 어리바리한 미키는 망설이다 결국 손가락으로 소스를 찍어 본다. 그렇다. 우리나라 속담에 따르면 미키는.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는.” 인물이다. 그러니 미키 17이 되도록 그렇게 당하면서 살아 온 거다.


나는 언제나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만화"라고 생각해 왔다. 만화도 여러 종류가 있다. 이토 준지 같은 공포도 있고, 각 잡고 봐야 하는 베르세르크도 있고, 영화보다 뛰어난 서사를 가진 우라사와의 만화도 있다. 그리고 내가 봉준호 감독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만화는 단연 <미래소년 코난>이다. 나는 그의 영화들을 혼자 이렇게 정의하곤 한다. “미래소년 코난 경찰 버전”, “미래소년 코난 중년 남자 버전”, “미래소년 코난 심각 버전”, “미래소년 코난 소녀 버전”, “미래소년 코난 성인물 버전”, 그리고 이번 미키 17은 미래소년 코난 코믹 버전이다. 아니 “미래 소년 포비 버전”이 더 정확한 표현같다. 그리고 나는 심지어 그의 컷들이 모두 만화 컷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영화가 잔뜩 묻은 만화 컷. 내 생각이다.


인간의 복제. 또 다른 클론과의 조우 등은 꽤 많은 영화에서 다뤘다. <6번째 날>이나 <멀티플리시티> <오블리비언> 등.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가장 처음 떠올린 영화는 <더 문>이다. 앞의 복제 인간이 죽지 않으면서 둘이 마주치는 점이나, 서로 캐릭터가 달라서 부딪히는 부분 때문에 더 유사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이 영화에서 복제된 인간이 죽음에 대해 고민하는 장면이 나온다. 과연 죽는 느낌은 어떨까? <미키 17>에서도 몇 번이나 사람들이 미키에게 물어본다. 죽는 느낌이 어떠냐고.


몇 번이고 죽는 미키. 게다가 그 죽음은 기억으로 복사되어 다음번 미키에게 전달되기까지 한다. 미키 17과 18이 만나고 나서야 우리는 익스펜더블도 죽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그 전의 미키들도 죽고 싶지 않았을까? 영화 속에서 그것에 대한 힌트는 없다.


죽는 느낌은 무엇일까?

하긴, 이 질문에 대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들 중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아는 사람이 없을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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