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남자들은 해병대를 많이 간다고 한다. 해병대는 625가 발발한 뒤에 창설되었는데,그때도 제주도 청년들이 많이 자원을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당시 제주 해녀들로 이루어진 해병대도 있었다고 한다. 그녀들은 주로 해상의 기뢰 설치 및 해체를 도맡았다고 한다. 또 전쟁 중마땅한 암호체계가없어서제주출신 군인들이 통화하는 것으로 암호를 대신하기도 했다고 한다. 알아듣기 극악인 제주말을 북한군이 알아듣기란 불가능했을게다.2차 대전 때 미군은 같은 이유로 나바호 원주민을 이용했었다.
맑은 누리 도서관에서 주최한 4.3 평화기행을 다녀왔다. 4.3 희생유가족회 부회장님의 안내로 답사한 제주는 눈물의 섬이었다. 관광이나 가는 섬이라고 생각했던 제주는 내게 슬픔의 섬이 되었다.
비극적인 4.3은 제주도민의 수를 3/4으로 줄였다. 공식적인 사망자가 1만 5천 명에 달하고 실재는 그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그때의 참상은 여러 증언으로 잘 알려져 있다. 나는 대학시절 이 증언들을 읽다가 포기했던 기억이 있다. 도저히 견디며 읽기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이 참상은 625가 발발하고 예비검속이라는 미명 아래 반복됐다. 때문에 제주도민들은4년간이나 이유 없이 죽임을 당하고 또 죽임을 당했다. 부모형제자식이 도륙되는 참상은 공포와 트라우마를 남겼다.
그리고 이 공포와 트라우마는다른 방식으로 표출된다.바로 제주 남자들의 해병대 자원이었다. 이것은 제주도민들은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무언의 항의였다. 공산주의자들과 가장 격렬하게 싸우는 것으로 자신의 부모형제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 아이러니였다.
아이러니는 또 있다. 4.3에서 악명을 떨쳤던 서북청년단. 그들은 북에서 내려왔지만, 자신들은 억울하게 쫓겨온 것이고, 공산주의라면 누구보다 치를 떠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 때문에 그들은 끔찍한 만행을 서슴지 않고 저질렀다.
이 모든 비극은 친일을 반공으로 덮으려 했던 친일파들에 의해 시작됐고 양민학살이라는참혹한 결과를 낳았다.보도연맹도 역시같은 맥락에서 자행된 학살이었다.제주를 시작으로전쟁 기간 동안전국은 학살로물들었다.공산주의를 악마로 규정짓자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잔혹한 고문과죽음이정당화됐던것이다.그리고 이 역사는 현재진행 중이다.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간첩을 조작하는 일은최근까지도 계속되고있다. 제주 4.3 은 그 시작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최근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제주 4.3에 관련되어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수형인들의 재심이 진행되고 있다. 변호사가 수형인들의 억울함을 밝히면 검사가 무죄를 구형하고, 판사는 무죄 판결을 한다. 2019년부터 매달 진행된 재심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
70년이 지났지만 4.3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렇게 역사는 더디지만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