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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len rabbit Jul 16. 2023

글쓰기. 삐딱한 태도는 척추만 힘들게 하는 게 아니다

내가 글쓰기 힘든 이유

(이것은 순전히 내 입장일 뿐미리 밝힙니다)


이게 고집인지 뭔지 알 수가 없는데...

금껏 시나리오 작가로 살아온 나는 이야기를 만들 때 몇 가지 피하려고 하는 지점들이 있다.


우선은 이야기를 쓸 때 어린아이를 때리고 죽이고 고문하는 따위는 아예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무리 천하 악당을 만들고 싶어도 그런 모습은 내 글에서 보고 싶지 않다. 때문에 영화나 티브이에서 비슷한 설정을 보면 작가가 무리하게 과한 설정을 쓴다고 생각하곤 한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어처구니없어 보이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렇다.


그리고 내 이야기에는 되도록 조폭을 등장시키지 않으려고 한다.  어린 시절에는 정말 조폭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동네 양아치 정도로 쪼그라들어있다. 이런 현실적인 이유 외에도 어떤 인물을 조폭으로 설정하면서 너무 쉽게 캐릭터를 만드는 게 싫은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내가 영화판에 처음 들어왔을 때 쏟아던 조폭영화들에 느꼈던 염증 반응이 남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런 류의 인물을 주조연으로 이야기를 만들 땐 대게 이 인물이 양아치라는 것에 방점이 있다. 거창한 조직 폭력집단이 그의 배경에 있는 것처럼 쓰지 않는 편이다. 한편으로 요즘은 합법화된 조폭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멀쩡한 기업들도 너무 양아치스럽기 때문에 내 기준에서는 둘을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기도 하다.


조폭이 염증을 일으킨다면, 냄새만 맡아도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는 건 재벌가(家) 이야기다. 재벌가는 사실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등장하고 있다. 장르가 멜러라면 더욱 심하다. 재벌가끼리 얽히고설킨 상황에 사랑쟁취러(lovecatchter) 춘향이 재투성이로 나타나고, 방자와 향단이가 까불대면 멜러의 전형이 완성된다. 그런데 나보고 그런 이야기를 쓰라고 하면 손을 젓고 고개를 흔든다. 아주 질색하는 편이다. 기실 멜러를 잘 못 쓰는 게 큰 이유이기는 하다. 게다가 내가 잡는 소재는 대부분 재벌가와 거리가 멀다. 솔직히 재벌가 3세와 재투성이 춘향이의 결혼은 판타지가 아닌가? 시침 떼고 판타지를 현실처럼 가공하려 들면 나는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것 같다. 물론 나도 재벌가 나오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보긴 한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하다. 이 분야에까지 내가 숟가락을 얹을 필요는 없다. 이런 쪽으로 잘 쓰는 분들은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곳은 시뻘건 레드오션이다. 그런 곳에 빠져서 간지럼에 벅벅 피부를 긁어가며 이야기를 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은 검사다. 검사라는 직업군을 캐릭터로 쓰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요새 나오는 많은 이야기에서 검사는 대게 악을 응징하고 약자를 보호하며 마침내 정의를 실현하는 인물로 나온다. 나는 그게 너무 꼴 보기 싫다. 정의로운데 배려심도 있고 게다가 착하고 잘생겼는데 무려 가정적이기까지 한 검사라니! 이게 얼마나 허무맹랑한 이야기인가. 아주 소수의 검사겠지만, 피의자 엄마를 검사실에서 강간하는 검사가 있는가 하면, 눈먼 돈만 있으면 전현직 검사들이 왕창 연루다. 심지어 검찰 동료들 앞에서 성추행을 당한 여자검사는 억울함을 방송에 나와서 눈물로 호소해야 하는 곳이 검찰이다. 여기에 무슨 정의가 있는가. 하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검사를 쓸 때면  무식하고, 돈 밝히고, 정치적이며, 동정심이라곤 한조각도 없는 캐릭터로 쓰곤 한다. 왜냐하면 이쪽이 훨씬 현실감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냥 하찮은 제 생각일 뿐이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러니 제발 영장만은...)


내가 왜 이런 규칙 아닌 규칙을 갖게 됐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동안은 영화 시나리오만 썼기 때문에 이 네 가지를 피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요새 드라마 쪽으로 일을 바꿔 보려고 애를 쓰는 가운데, 무엇보다 재벌가를 등장시키지 않는 게 치명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 다른 부분들이야 충분히 대체 가능하니까 상관없는데, 재벌가를 쓰고 싶지 않아 하는 건 너무 큰 약점이 되고 있다.


만일 <비포선라이즈>에서 마지막에 두 사람이 기차역에서 헤어졌을 때, 줄리델피가 우연히 신문을 보고 에단호크가 재벌 3세라는 것을 알고 놀란다면 어땠을?  순간 에단호크는 공항에서 개인 제트기를 다면? 그랬다면 우리나라에서 이 영화는 <타이타닉>만큼 대흥행을 했을지도 모른다. <뽕네프의 연인들>의 줄리엣비노쉬가 사실은 재벌가 외동딸이고, <첨밀밀>의 여명 사실은 중국 재벌 2세였다면 어땠을까? 영화사에 길이 남는 영화가 되지는 못했겠지만 우리나라에서 흥행은 더  되지 않았을까? 세상이 그렇다. 범한 사람의 괴랄한 성적 취향은 변태로 불리고 곧바로 범죄와 연관되지만, 엄청난 부자의 그것은 은밀한 유혹이 된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그레이가 평범한 사람인지, 재벌인지에 따라 그 그림자조차 범죄에서 매혹으로 표변하지 않는가.


사실 재벌이란  편리한 설정이다. 편리함 소소하고 성가신 문제들을 일일이 다루지 않아도 된다는 커다란 이득이 생긴다.  2시간에 끝나는 영화를 써온 나는 이제 16시간, 20시간 계속되는 이야기를 구상하는 중이다. 이때 이런 편리한 설정을 놔두고 생고생을 한다는 건 손해 막심한 일이다. 그냥 액션 장르를 쓴다고 해거대  싸우는 흙수저는 빌드업도 힘들고, 결론도 사람들이 싫어하는 비극이 되고 만다. 일례로 흙수저가 거대악과 싸운다는 점에서 비슷 하달 수 있는 <테러리스트>와 <사냥개>는 비극과 헤피엔딩으로 끝이 갈렸다. <사냥개>가 헤피엔딩이 될 수 있었던 건 재벌가가 조력자로 있었기 때문이다. 이 편리한 설정 하나로 주인공이 해결해야 할 무수한 과제를 쉽게 달성할 수 있었다. 반면 <테러리스트> 주인공은 이 모든 과제를 몸빵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다 보니 비극이 되고 만다. 이걸 헤피엔딩으로 끝맺기는 하늘의 별 따는 것만큼 어렵다. 사실 이럴 땐 정의로운 검사님이 있으면 .  전지전능한 검사님이시여!


나도 비극적인 엔딩은 싫다. 그런데 위의 네 가지는 더 싫다. 바로 이 점에서 작가로서비극이 시작다. 나 역시 흙수저 주인공처럼 쉬운 길 두고 죄다 몸빵을 해가며 이야기를 밀고 나가야 하꼴이기 때문이다.

하다 보니 얘기가 길어졌다. 근데 그 사이 스토리가 막 떠오르기도 하다.


-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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