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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썸머 Mar 23. 2024

의식의 흐름대로

선택의 자유로움

공포가 일으킨 변화.

삶을 나아가는데 목적의식이 뚜렷해졌다. 생각이 껴들기 전에 행한다. 의식은 추구하는 목표에 저만치 가 있고 일상에서는 생각보다 몸이 반응한다.


나를 삼킬 것 같던 공포가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게 하기 위해 나를 끌고 나아간다. 내 속의 또 다른 내가 나를 앞에서 끌어준다. 보이지 않고 전해지는 힘을 따라간다. 불빛 하나 없는 터널 속에 밖에서 빛이 한줄기 들어와 길을 안내하는 것처럼, 밝은 빛에 현혹되어 그 빛을 보고 간다. 마치 에코의 소리를 듣고 따라가는 듯 나는 그 이끌림에 홀려 있다.


너무나 갑자기 준비 없이 닥친 공포에. 순간 피하고 싶고 숨고 싶고 포기하고 싶고 끝내고 싶었다. 그다음 내 몸의 반응은 힘 풀림이었다.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 수영강습을 위해 수영장 레인에 들어가서도 오늘 내가 수영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다행인 건 같이 강습받는 분의 지침이 나의 지침보다 더해 웃음이 나왔고 그게 또 반전이 되었다. 시작 십여분이 힘들고 이후 오십 분의 강습이 끝날 때까지 할만한 게 보통 수영장에서의 바이오리듬이다. 그날도 그랬다. 함께한 나보다 나이 있는 아저씨의 힘겨움을 재미로 위로로 삼았다. 나의 악한 인간 본성의 단편쯤. 남의 약함에 위로받은 건지. 웃어서 회복된 건지. 어떤 이유에선지 웃었고 웃어서 행복해진다는 말대로 나의 몸에서 힘을 뺀 심각한 감정에 생기를 살아나게 해 주었다.


나에게 일어난 공포는 수업 중 책 읽기였다.

학창 시절부터 발표는 떨리는 일이었다. 책 읽기 시간은 내 떨리는 목소리가 나에게도 들리는 날. 창피함에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쉬는 시간에 잘 놀다가도 발표시간만 되면 떨고 책 읽으면 누구보다 많이 떠는 아이. 목소리가 떨려 교실이 조용했다. 선생님의 말이 기억난다. 중학교 2학년 때, "그런 애가 있어. 평상시에는 잘 노는데 발표만 하면 떠는 애." 그게 나였다.

타고난 기질. 체질. 긴장감이 크고 발표해야 한다고 하면 가슴이 두근두근 큰 북을 치고 조절은 안되고 여지없이 목소리는 떨리고 얼굴과 몸은 경직된다. 중고등학교 내내 그랬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한 번은 읽어야 하는 시간에 내 차례를 기다리다 창문을 열었다. 내 차례에 읽어야 하니 긴장감을 낮추려고. 창밖을 보고 파란 하늘 시원한 바람을 쐬고 마음을 딴 데다 두면 조금이나마 덜 떨릴까 하고 했던 행동이었다. 그만큼 발표 전 긴장이 컸고 조절되지 않는 것이었다.

대학 때는 출석을 부를 때도 의식이 되어 "네"하는 한 글자의 대답에도 떨지 않으려고 음음 거리며 목소리를 다듬고 침을 삼키고 안 떨리게 신경 쓰며 매번 대답하려 했다. 그래도 떨리거나 너무 작게 말해 이름을 다시 불러 그때 크게 놀란 듯 "네에" 하고 대답하기도 했다.


 번은 내게 호감이 있는 남학생이 일 학년 때 내 교양과목 수업에 들어왔었고 그날이 첫 번째 작게 대답해 출석을 두 번 불러 재대답을 했던 날이었다. 수업 끝나고 한 시간 반동안 내내 창피함을 지닌 채 있다 서둘러 꽉 차 있던 180명 강의실을 빠저나 갈 때 이 수업을 듣지 않는 그 남학생이 웃으며 내게 다가와 아는 체를 하는데 난 놀란 얼굴로 그 얘의 얼굴을 보았고 당황해했다. 나의 당황하는 얼굴을 본 그 남학생은 같이 어쩔 줄 몰라하며 당황해 어색하게 돌아서 갔다. 그 애에겐 안 느껴졌을지도 모를 나의 창피함이지만 나는 수업 시작 전 출석부의 대답만으로도 창피함을 수업 끝까지 지니고 있었다.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 강당 안 180명의 학생을 의식했다. 아무도 아니면 불과 몇 명만이 나의 출석 부름에 대한 답을 의아하게 생각했을까. 아니 그것도 아닐 것이다. 아무 도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그때 난 바보같이 다들 자기 생각에 바쁜 사람들이 나를 신경 쓸 거란 착각 속에 살았다.

나에게 관심을 보여 호감이 갔던 그 남자애와의 쉬운 연결고리가 될 기회를 나의 허무하리만치 과장되어 만들어진 창피함으로 잃어버렸다. 남자애가 먼저 다가온 이성으로서의 첫 번째 호감이었는데. 이후 내가 그 아이를 더 좋아하게돼 시간이 한참 흐른 지금 글을 쓰다 그 일이 기억 속에서 끄집어 나왔다. 나의 출석부 대답의 자그마하지만 개인에게는 결코 작지만은 않은 나의 공포 이야기를 쓰다 그 기억이 엮어 나왔다.


재밌다. 이 부분은. 나의 공포 자백서가 될 거 같던 이야기 속에서 대학 1학년 3월의 봄 대강당에서 날 만나기 위해 내 수업을 듣고 끝나고 나오기를 기다려 바삐 나가던 나를 만나려고 달려오던 그 애의 환한 웃던 얼굴이. 오래된 기억이라 사실에 바탕한 이야기에 순수필터가 입히고 각색되어 18k나 14k 정도의 사실인 이야기로 편집되었을 수 있다. 기억이 아름답게 각색했을 수 있다. 그 애의 웃는 얼굴을 과장되게 밝게 떠올릴 수 있으니까. 글의 방향 전개가 샛길로 빠졌다.

그만큼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목소리 내는 것에 대해 의식적이고 내 몸은 긴장됨으로 반응한다.

보통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출석 부른다고 대답하기 위해 목소리 떨리지 않게 하려고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큼큼거리지 않고 침을 삼키거나 힘주어 소리조절을 하려는 노력을 들이지 않을 것이다. 매번 그 과정이 의식적이었던 나는 별일 아닌 모든 것에 의식적인 연습을 해 온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예민했던 것, 남들보다 더 사람의 감정을 느꼈던 이유 같다. 얼굴에 스치는 작은 미세한 표정하나에도 감정을 읽고 거기에 덧대어 나에 대한 부정적인 해석으로 확장했고 귀결되어 쇼페하우어의 염세주의적인 말에 큰 공감과 위로를 받는 사고주의자가 되었었다.

타고난 성향과 기질적인 측면이 심장이 약하고 잘 긴장하고 떨려하고 부끄러움이 많고 사람 앞에 나서는 걸 창피해하고 두려워하고 마음이 여려 눈물이 많다. 그 기질은 사춘기의 학창 시절을 거치며 나의 자존감 형성에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떨리는 내가 내 의견을 말하는 일은 잘 없었다. 그저 남 따라 하는 정도. 친구와의 관계도 평상시의 나와 긴장감에 떨며 발표하는 내가 달라 그 모습에 자신이 없던 나는 친구에게도 편하게 가까이 다가가기를 어려워했다. 마음을 나누는 친구는 학년이 높아질수록 만들기 어려웠다. 가리고 숨겨야 할게 많아 들킬까 조심하게 되니 어떤 말도 가까이 가는 것도 하지 않게 됐다. 자연스레 마음 터놓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누구에게 이런 나의 못난 모습을 말을 할 수 있을까. 말한다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그때의 나이에 누가 있었을까.


타고난 약한 내면으로 살아온 지금, 공포가 가져온 것은 물러날 수 없는 자리에 있음을 알게 해 준 것. 인생을 살아내야 하기에 나를 포기할 수 없어 앞으로 나아갈 방법을 강구하게 했다. 말하기 자리, 책 읽기 자리를 찾아 그곳을 연습장 삼아 연습하게 했다. 물러나 조용히 가만히 자리하던 나를 행동하게 했다. 내 안의 내가 나를 조종하기 시작했다. 두려움을 뚫고 나가고 있다. 그 사이에 느끼는 느낌은 없다. 오로지 행동만 있다. 생각으로 키운 두려움과 공포 같은 감정들이 없다. 바로 행동하면 불필요한 많은 것들이 사라진다. 그중 공포도 있다. 필요 없는 감정을 나의 생각이 키워왔던 것이다. 공포에 맞닥뜨리고 도망치고 싶던 것에서 두려움을 뚫고 나를 연습의 공간으로 내던지며 나아가는 나로 바뀌었다. 답은 생각전환 그리고 행동이었다.


쓰고 보니 글도 제목처럼 의식의 흐름대로 쓰였다. 처음엔 사고 싶으면 사고 하고 싶으면 하고 준비할 게 떠오르면 준비하는 등 생각하고 의식하는 대로 막힘없이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쓸 예정이었다. 그런데 쓰다 보니 아침에 <나의 신념>이라는 글쓰기 발표를 위해 쓰던 일기의 반복 글이 써졌다. 아침에 썼지만 더 풀어야 할게 남아 내 속에 있는 걸 더 풀어헤치고 싶었나 보다.

일기장에 볼펜으로 쓰던 것에서 블루투스 타자기로 쓰는 글쓰기가 또 다르다. 핸드폰과 블루투스 타자기에 익숙해져 있을 때는 이걸로 글 쓸 때 잘 쓰였고 오랜만에 종이에 볼펜으로 글 쓸 때는 더 느린 속도에 생각대로 글쓰기가 안되었고 시작 부분이 어렵게 느껴졌는데 이 주간 노트에 일기를 다시 쓰면서 종이에 글쓰기가 다시금 편해지고 반대로 잠깐 쉰 블루투스 타자기 쓰기가 어색해 생각의 흐름이 뚝뚝 끊기고 글의 연결이 매끄럽지 않다.


그럼에도 계속 쓴다. 잘 쓸려고 쓰는 글이 아니라 나의 속에 것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감추고 사는 것이 버거워 들어내고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로 조금은 더 편하고 쉽게 살고 싶어서.


그동안 나는 많이도 변했다. 딱딱한 사고가 많이 유연해졌고 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도 긍정적으로 바뀌었고 생각보다 행동하는 사람이 됐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실패를 경험으로 생각하고 좋은 습관을 갖고 지속해 가고 책을 좋아하게 됐고 매일 글을 쓰고 건강한 식습관을 갖고 운동으로 기분전환을 하고 배움과 취미에 적극적이게 됐다. 나를 내가 잘 가꾸게 됐다. 내가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나의 하루를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내게 감사할 줄 알게 되었다.

이제 조금 남에게도 나의 여유를 사랑을 감사를 덜어 줄 수 있게 된 거 같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살며시 미소 지어진다. 다행이다. 글의 마무리가 긍정적이어서.


글을 쓸 때 마무리는 긍정적으로 쓰라는 조언을 들었고 오늘 난 그 조언에 따라 나에 대한 긍정적인 글로 마무리한다. 내용은 쓸게 더 많지만 이 정도까지가 맞는 거 같다. 아침에 쓴 글을 반복하여 다시 쓰는 것과 타이핑의 피로가 몰려와 글쓰기가 쉼 없이 계속 쓰이는 게 아니라 생각하며 쓰게돼 에너지 소모가 있는 글쓰기를 하고 있다. 이럴 땐 적당히 끊어주기도 필요한 거 같다. 내용 보강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접고. 피곤할 땐 빠른 마무리로 내게 휴식을 주어도 된다.

그리고 글쓰기로 오전 시간을 보낸 나를 기분전환과 에너지 보충을 위해 오후 수영장에 갈 생각이다. 토요일의 오후 수영장은 처음이다. 오늘은 사고 한번 입은 보라색 체크무늬 수영복으로 입어야겠다. 수영강습 있는 날과 연습 가는 날은 마음이 다르다. 몇 달 배우지 않은 초보라 수영복 구매에 재미를 느끼고 있고 새로 산 수영복은 연습 있는 날 편하게 입고 간다. 어제도 새 수영복을 개시했다. 내 맘에 든 초록계열에 그림이 있는 수영복이었다. 오늘도 그걸 입어도 좋겠지만 사이즈가 한 사이즈 작아 한번 입고만 보라색 체크무늬 수영복도 한번 더 입어보고 싶어 오늘은 그걸 입어보기로 한다.  맞춤법검사를 하고 글쓰기를 마무리하고 글을 저장해 두든 발행하든 하려 했는데 자꾸만 더 써지고 더 써진다. 이젠 정말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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