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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Jan 06. 2023

철로 위로 스친 열차가 불러온 기억들은

우울은 병인지 성정인지

작은 역사에서 환승을 기다리던 그날은 정적이 노곤하게 익어가는 오후였다. 처음 와 보는 역. 나는 귀가하던 길, 문득 충동이 일어 한 번도 내린 적 없는 연고 없는 역에서 덜컥 열차에서 내렸다. 기둥에 매달린 시곗바늘은 4시에 조금 못 미쳤다. 미처 다 식지 못한 햇살이 가득한 플랫폼 위에서는 드문드문 초록빛이 눈에 띄었다. 나른해지는 몸, 가볍게 풀린 눈꺼풀이 빛에 살짝 찌푸려지는 그런 오후. 실려 오는 풀 내음. 부유하는 먼지는 빛과 그늘이 경계 지는 사선 바깥에서 느릿느릿 움직인다. 푸른 하늘에는 연구름이 높게 지나간다. 그 사이를 가르며 한순간 철로를 따라 화물 열차가 거칠게 비끄러져 달려갔다. 쿵쿵거리며 달려 사라진 열차 뒤로 순간 사나운 미풍이 일었다. 바람이 어루만진 머리칼은 햇살이 부서지는 어깨너머로 천천히, 가볍게 넘어가며 흩어졌다. 뺨을 스치는 간지러움에 눈이 찌푸려졌다. 귓가에 머릿결이 살풋 스치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덜컹, 덜컹하는 바퀴의 진동은 어느새 아득하게 멀어져 갔다. 썰물처럼 기차가 빠져나간 자리는 너무나 고요했기에 맘이 다 어지러웠다. 진동마저 멎은, 기차가 지나간 뒤 유독 텅 비어 보이는 정거장에는 침묵이 진하게 차오른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모른 체하고 있는 것일까. 그 순간, 거꾸로 돌아가는 고장 난 태엽처럼 난 사정없이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흘러들어 갔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순간에 난 햇살 속에서 기억나지 않는 그때를 문득 그리워한다. 색이 바랜 기억에 닿을 수 없다는 생각에 난 그토록 역 안에 들어찬 온기에 안겨 있음에도 외로웠다. 멍하니 환영처럼 번지는 순간을 회상하는 일은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누군가의 미소를 생각하는 것과 같이 슬프구나, 이건 너무 빠르게 지나쳐버린 기차 때문이라고, 그렇게 생각해버린다면 좀 나을까. 빛이 부서지는 플랫폼에서 눈동자가 머금은 가을 풍경만은 또렷했다. 그래서 별안간 겁이 났다. 너무나도 선연한 그 모습,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순간이라서. 숨이 차올랐다.


지나간 일이 추억으로 남겨지는 건 아름다운 일일까, 슬픈 일일까. 그곳에 다시 돌아갈 수 없지만 아직 기억 속에 존재하기에, 표류하는 과거의 파편들은 신기루처럼 자꾸만 살아나 문득문득 나를 아프게 한다. 확실한 것은, 희미해진 무언가를 추억하는 일은, 그 순간을 통째로 게워냈다가 다시 삼키는 일을 반복하는 것 같다고 할까. 익숙해지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겠지.


이 작은 공간에서 스치는 감정과 문장들을 놓치기 싫어 그 자리에서 허겁지겁 노트와 펜을 꺼내 단어들을 휘갈기듯 적어 내렸다. 조금만 지나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그 느낌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살면서 흘러가는 것들, 내 의지로는 붙잡을 수는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은 나를 슬프게 만들곤 한다. 시간들, 시간이 간직한 순간들, 그리고 변해 가는 사람의 마음 같은 것들. 흘러가게 놔두는 것이 아름답다는 걸 알면서도 한 번씩은 구차해지고픈 순간이 자주 나를 찾아오곤 한다. 스쳐 지나가는 것이 어떻게 슬프지 않을 수 있을까. 다만 거기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할 뿐. 무뎌지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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