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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마리 Apr 30. 2023

스빠시바!! 인류애가 충전되었어

내가 다시 길을 떠나는 이유

블라디보스토크역

드디어 오늘은 아 기다리고 고 기다리던 시베리아횡단열차 탑승 날이다. 내가 갈망하던 열차의 탑승을 앞둔 날 때문인가, 어제의 사건 때문인가 일어날 시간과는 다르게 눈이 일찍 떠졌다. 침대 안에서 더 농땡이를 피워도 되었지만 어제의 교훈이 나를 부지런히 움직이게 만들었다. 깨끗하게 몸을 단장하고 짐을 챙겼다.  


엄청난 설렘이 나를 가득 채웠다. 기다리던 시베리아 탑승 열차 날이라서? 아니 또 얼마나 힘든 일이 나에게 펼쳐져있을지 예측이 안 되어서. 그럼 ‘셀렘’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지 않나? ‘셀렘’의 사전적 정의는 마음이 가라앉지 아니하고 들떠서 두근거림인데 말이다. 맞다. 반대로 이야기했다. 무려 러시아까지 우기고 우겨서 왔는데 계속해서 불안, 분노라고 말할 수 없지 않나? 나는 나의 뇌, 기분이라도 속여야 했다. 그것이 아무도 믿을 수 없고 곁에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였다. 마치 나의 마음을 말해주는 것처럼 무거운 배낭을 매고 부지런하게 숙소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역으로 향했고 그때가 오전 10시였다.


프린트된 티켓을 들고 11시 기차를 탑승하기 위해 기차번호가 뜰 때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시간은 점점 지나 10시 30분이 되었고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우리나라처럼 기차시간이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연착이 되어도 기차번호라도 뜨는 것이 정상이 아닌가? 주변을 둘러봐도 안내방송, 사람들 말소리 등 온통 러시아어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아서 순간 물에 들어가 있는 줄 알았다. 이렇게 앉아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움직여야 했다. 글을 못 읽으니 손짓, 발짓이라도 할 수밖에!! 큰 가방을 메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시작했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고 시간은 순식간에 11시가 되었다.


기차를 놓쳤다! 와우 대단한 걸! 이걸 타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눈앞에서 기차를 놓쳤으니 말이다. 이건 늦잠 자서 놓친 지하철 하고 차원이 다르다. 절망하고 있는 내가 눈에 띄었는지 역무원이 다가왔다. 어제의 일이 생각나면서 고민했다. 그냥 갈까? 트라우마 아닌 트라우마였다. 대답을 망설였다. 그분은 오히려 나를 기다렸다. 아무것도 재촉하지 않고 그냥 기다렸다. 그 행동 때문이었을까? 그에게 아무 말 없이 티켓을 보여주었고 그는 내가 알고 있는 기차 탑승 시간은 모스크바 기준이며 여기 현지 시간으로는 오후 7시 10분에 열차가출발하고 30분 전에 전광판에 기차가 들어올 플랫폼이 안내된다고 하였다. 다행이었다. 이제는 시차를 헷갈리는 것쯤은 놀랍지 않았다. 나의 실수였고 방법을 찾았으며 행운이 따라 기차를 놓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으며 나의 허점을 악용하지 않고 도와준 사람이 있어 더 다행이었다. 그걸로 되었다.  


대기실 의자에 앉아서 앞으로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구상 중이었는데 나에게 안내를 해준 역무원이 다가와 대뜸 “걱정하지 마 알다시피 너는 짐을 맡기고 시내를 구경할 시간이 생긴 거야 공짜시간 말이야” 하며 물품보관소를 안내해 주었다. 그리고 “편하게 관광하고 이따가 보자”는 말과 함께 사라졌다.   

그 순간 별거 아닌 그의 호의가 내가 마음속 가지고 있던 불안과 분노를 부시고 기차여행을 즐기라는 주문 같았다. 너무 고마웠다. 나는 어제의 일을 떠나보낸다고 결심했지만 아직 내 안에는 상처받은 기억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행동으로 대신 위로를 해주었다.


내가 겪어야 할 수많은 사람들 중 정말 0.1%밖에 해당이 안 되는 나쁜 사람을 만난 것뿐인데 먼저 만났다는 이유로 다 악한 사람일 것이라는 일반화를 하며 열차에 탑승할 뻔했다. 하루에도 수 십 명 아니 수 백명의 사람들이 오고가는 열차를 타는 나인데 사람을 겪어보지도 않고 내 멋대로 판단하는 나쁜 생각을 할 뻔했다. 좋은 사람과 만들 추억을 얻을 기회를 날리는 어리석은 선택들 할 뻔했다. 그렇게 밑바닥을 보였던 나의 인류애가 가득, 아주 가득 충전되었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었다. 더 나아가 이 친절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비로써 진짜 온 마음으로 설렌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탑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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