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잘 커요?"
버스에서 우연히 만난 우스갯소리 잘하는 지인이 나를 보자마자 물었다.
찰떡같이 알아듣고 냉큼 웃으며 대답했다.
"네~무럭무럭 잘 크고 있어요~"
무럭무럭 잘 크는 아들이 있을 나이는 훌쩍 넘은 것 같은지 옆 사람이 슬쩍 곁눈질한다.
"먹을 것만 주면 저 혼자 잘 크는 거 아녜요?
지가 집을 지키나 애교를 부릴 줄 아나, 쥐를 잡나!"
만날 때마다 고양이 얘기를 하니까 이젠 만나면 먼저 얘기를 꺼낸다.
"한 번 키워 봐요~"
이젠 고양이가 얼마나 귀엽고 매력 덩어리인지 말하기도 멋쩍어 그저 웃으며 말한다.
나도 차르를 만나기 전에는 도대체 고양이를 왜 키우는지 이해를 못 했다.
어릴 때 우리 집에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노란 치즈였는데 그때는 고양이는 다 누렁이 아니면 줄무늬였던 것 같다.
엄마가 나비라고 불러서 이름이 그냥 나비가 되었다.
늘 한 식구처럼 지내는 강아지들한테는 메리 해피 쭁 도꾸 심지어 린티라는 멋진 이름까지 지어주며 식구들이 이름 짓기에 머리를 맞댔는데,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드는 나비는 식구라고 생각하지도 않은 것 같다.
나비는 지 맘대로 어디를 싸돌아 다니는지 보이지 않다가 밥 때면 들어오고 먹고 나서는 양지바른 곳에서 팔자 좋게 그루밍하던가 늘어지게 잠만 잤다.
어느 날 나비와 단둘이 방에 있었는데 이놈이 나를 노려보더니 갑자기 달려들어서 놀라 자지러졌다.
그때부터 고양이는 공포스러운 존재가 되어 키우고 싶지 않은 것은 물론 귀엽다는 생각도 안 들었다.
나에게 고양이는 오래도록 그때의 이미지로 남아있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누가 고양이를 기른다고 하면
"개를 기르지 왜 고양이를 길러요?" 하며 정색을 했다.
우리 가족이 가장 좋아하는 TV프로는 동물들이 나오는 것인데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는 시간을 놓칠세라 챙겨서 열심히 보지만 '고양이를 부탁해'는 두 말없이 그냥 패스했다.
'동물농장'도 다시 보기에서 개가 나오는 것만 찾아서 보고 또 봤다.
행복한 개 이야기를 보며 즐거워했고 가슴 아픈 사연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고양이한테는 그런 감정이입이 도대체 되지 않았다.
2년 전
꾀죄죄한 길냥이가 우리 집 재활용 박스에서 발견됐을 때도 질색을 하고 다른 곳으로 보내려고 무진 애를 썼다.
만약 그날 아들이 없었다면 차르는 지금 우리 옆에 없었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나서는 깊은 정이 들기도 전에 차르는 복막염이라는 중한 병이 걸렸다.
행여나 죽을까 치료하기 위해 오랫동안 쏟았던 정성과 애태움 때문인지 차르는 애지중지 귀한 존재가 되었다.
아픈 자식에게 더 관심이 가고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 것과 똑같았다.
그러나 주기만 했을까?
차르로 인해 말수 적은 우리 가족은 말이 많아지고 웃음소리는 매일 현관문을 넘는다.
원탁에 빙 둘러앉은 가족들 중에는 차르도 한 자리 차지하고 있다.
엄마 치킨 한 입, 차르 간식 하나!
"차르 손!"
"이쪽 손!"
"저쪽 손!"
고양이도 '손 줘'를 할 수 있다.
꼬리를 바짝 세우고 거실을 지나 이 방 저 방 어슬렁 대는 차르의 여유로운 걸음걸이가 평화롭고 행복하다.
강아지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은 우리 가족 모두 개는 거의 패스, 고양이는 항상 ok다.
그래서 '나는 고양이를 싫어해'라고 함부로 말한 나를 미워한다.
차르의 깜박이는 눈을 보면
'라포(rapport) 형성'이라는 말이 딱 떠오른다.
의사소통에서 상대방과 형성되는 친밀감 또는 신뢰관계라는 뜻인데
요즘 요양보호사자 자격증 취득 공부하면서 사회복지 파트 부분에 나오는 단어이다.
차르와 우리 가족은 라포형성이 된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