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천의 해가 서편으로 기울려고 할 때 대형 군용 트럭이 뽀얗게 먼지를 일으키며 마을 어귀로 들어섰다.
-야, 우리 이사 간다~
놀면서도 트럭이 언제 오나 마을 입구만 흘깃거리던 나는 가슴이 벅차 집으로 달렸다.
집채만 한 국방색 멋진 트럭이 정확히 우리 집 앞에 멈춰 있었다. 마당에 쌓여있는 짐이 모두 실리자 아버지와 군인 아저씨가 우리들을 번쩍 안아 차에 올려주었다. 나는 멀미 때문에 바람을 쐬어야 한다고 고집을 피워 뒷 칸 짐 위에 올라앉았다.
이웃 사람들과 손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하는 동안 트럭이 서서히 출발했다. 높은 트럭을 올려다보는 동네 아이들을 보고 나는 어깨가 으쓱해졌다.
트럭은 구불구불 좁은 마을길을 헤치고 나와 신작로로 들어섰다. 늦여름의 제법 시원한 저녁바람은 트럭 높이 올라앉아 있는 내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휘날리게 했다.
그동안은 아버지 근무 부대가 강원도 안에서 뱅뱅 돌았는데 이번에는 좀 멀리 간다고 했다.
초등학교 입학 후 벌써 두 번째 전학이다.
사실 초등학교 입학도 제 때에 못할 뻔했다. 이사가 잦다 보니 아직 전입신고가 안 되어 있어 취학통지서가 나오지 않은 것이다. 새로 이사 간 동네 아이들이 "이제 난 학교 간다" 하고 자랑하는 바람에 샘이나서 그 길로 면사무소로 달려가 나도 여덟 살이라 학교 가야 된다고 떼를 썼다. 부모님과 연락해 부랴부랴 입학 절차를 밟았다. 그때는 형제들도 많고 아이들은 방목되어 자라니 스스로 제 앞가림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입학한 첫 학교에서는 겨우 한 학기만 다녔다.
잦은 이사로 인해 친구를 사귀는 것과 학업에 적응하는 일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은데 돌이켜보면 나는 새로운 변화를 무척 즐겼던 것 같다. 친구들과 놀다 커다란 군용 트럭이 우리 집을 향해 오면 신이 나서 자랑했다.
새로운 학교, 새 선생님, 낯선 친구들이 나를 들뜨게 했다니, 다행스러운 일인지 슬픈 일인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와는 참 달랐구나 싶다.
조각조각 기억의 단편들도 마치 다른 아이를 보는 것처럼 쓴웃음을 짓게 한다.
그때는 욕심도 많고 샘도 많아 남에게 지는 일이 생기면 눈이 붓도록 울어서 엄마가 '싸납쟁이' 라고 불렀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는 일이 있다.
받아쓰기 시간이었다. '의좋은 형제'라는 단원이었는데 깜깜한 밤에 형은 가난한 아우를 위해, 동생은 식구 많은 형을 위해 자기 몫의 볏단을 밤마다 몰래 나르는 이야기였다. 나는 선생님이 부르는 낱말을 모두 다 썼는데 한 문제 때문에 끙끙 앓고 있었다. '캄캄한' 인지 '깜깜한' 인지 헷갈렸다. 캄캄한으로 썼다 지우고 깜깜한으로 다시 쓰기를 몇 차례나 해서 공책은 새까맣게 되고 구멍이 뚫렸다. 그때 내 손은 책상 서랍에 있는 국어책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공책을 걷기 시작했을 때 나는 고개를 숙이고 의좋은 두 형제가 볏단을 들고, 깜깜한 밤에 때마침 얼굴을 내민 달빛 아래서 서로 마주쳐 놀라는 장면을 살짝 펴 보고는 얼른 '깜깜한'이라고 썼다. 고개를 드니 내 옆에는 그 당시 우리 또래보다 키도 덩치도 훨씬 커 오빠 같던 분단장이 내가 공책을 내기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나는 혼자 100점을 받고 칭찬을 받았다. 분단장은 내 행동을 봤는지 못 받는지 아무 말도 없었다. 나는 떨리던 가슴이 진정되자 그에게 아끼던 지우개를 줬다.
내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
이제 강원도 양구군...으로 시작하는 주소만 있는 줄 알았던 강원도 촌놈은 경기도로 진출하게 되었다. 3학년 1학기를 마친 때였다.
트럭 위로 불쑥 올라온 내 얼굴 옆으로 가로수들이 휙휙 지나쳐 갔다. 우리 트럭 뒤로 뽀얀 먼지가 일고, 마주 오는 차도 뿌옇게 먼지 세례를 퍼부우며 지나갔다. 사방으로 펼쳐진 논밭을 지나고 진초록 녹음을 헤치고, 강을 옆에 끼고 끝없이 달리는 동안 해는 뉘엿뉘엿 지고 나는 군인 아저씨 옆에서 잠이 들었다.
어두워져서야 우리는 낯선 고장의 낯선 집에 도착했다.
아버지가 미리 얻어 놓은 커다란 기역자 기와집 마당 건너 긴 사랑채가 우리가 앞으로 세 들어 살 집이었다.
할머니처럼 쪽을 진 주인집 아주머니가 맞아주었는데 몸이 마르고 인상이 사나워 보였다.
우리 남매들은 짐으로 가득 찬 방에 이리저리 쓰러져 잠이 들었다.
돌고 돌던 강원도를 떠나 도착한 경기도의 첫 밤이었다.
다음날 아침, 낯선 집에서 일찍 잠이 깬 우리 가족을 깜짝 놀라게 할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아끼던 빨간색 트랜지스터 라디오에 긴 자루가 달린 커다란 쇠갈퀴가 걸려 있었다. 누군가 우리 가족이 잠든 새 훔쳐가려고 시도했던 것 같다. 그 무시무시한 걸로 우리 식구들을 해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얼마나 피곤했는지 밤에 벌어진 일을 아무도 몰랐다. 그 와중에 왜 못 훔쳐갔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그 빨간 트래지스터 라디오는 아버지 음악 사랑의 시작이기도 했다. 그 후로 전축을 제작하고 레코드 판을 모으는 것이 아버지의 취미이며 즐거움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 주인집은 박씨네였다. 지금도 언니와 나는 박씨네 하면 말을 안 해도 그냥 웃음으로 공유하는 추억들이 몰려온다.
박씨네는 우리 만큼이나 형제자매가 많았는데 큰 딸 선녀 언니와 큰 아들은 집을 떠나 근처 관광지에서 장사를 해서 볼 수가 없었고 집에는 두 딸과 두 아들이 있었다. 그중 선숙 언니는 나의 언니와 같은 학년이어서 서로 금방 친해졌다.
박씨네는 밤나무가 많았다. 담 안에 있는 넓은 밭에 큰 밤나무가 여러 그루 있었고, 우리 집보다 돌계단을 두 개 올라가 있는 안채 뒤에 아주 큰 게 세 그루 더 있었다. 어찌나 크고 잎이 무성한지 하늘을 다 가려서 뒤란은 낮에도 어두컴컴했다. 가을이 되면 알밤 떨어지는 투두둑 소리가 우리 집까지 들렀다. 언니와 나는 떨어진 알밤을 주인집 식구들 몰래 주워오려고 꼭두새벽에 일어나기도 했다.
우리와 주인집 애들하고는 친하기도 했지만 알밤에 대해서만은 양보하지 않았다. 박 씨 아주머니나 그 자식들은 우리가 알밤을 차지하면 훔쳐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엄마는 그런 것을 속상해하면서도 알밤 주워오는 것은 말로만 말렸다.
주인집 애들하고 싸우면 우리도 결코 지지 않는데 세 들어 산다고 무시하는 거라고 생각하셨다. 늘 싸우지 말라고 노래를 부르면서도 일단 싸움이 일어나면 잘잘못을 가리는 건 사라지고 무조건 자식편만 들었다.
그건 우리 엄마 안여사만의 교육방식이었다.
예를 들어 자식이 울며 집에 왔을 때 엄마는 자초지종을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자식 편에 서서 상대방을 탓하고 욕했다, 상대방이 선생님일지라도 말이다. 점차 마음이 누구러진 자식은 슬슬 '그게 아니라~'하고 사연을 털어놓는다.
내가 사춘기 때는 엄마의 그런 처사가 비이성적이고 무식해 보여서 무척 짜증을 냈다. 참 아이러니한 것은 그런 엄마 밑에서 자란 나는 자존감이 높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내 자식에게 똑같게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자식이 슬프고 화날 때는 일단 무조건 자식 편들기' 말이다
나의 아들들도 내가 보기에는 정서가 안정되고 자존감이 높아 보인다. 사춘기도 둘 다 있는 듯 없는 듯 지나갔다.
경기도에서의 첫 집 박씨네를 시작으로 우리 가족은 그 근처로 이사를 다니기는 했지만, 아버지 근무처를 따라다니지 않았다. 대신 아버지 혼자 타지 생활을 하셨다.
점점 커가는 다섯이나 되는 자식들 교육과 안정된 생활을 위해서였다.
엄마는 아버지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점차 건강도 좋아지고 생활력 강한 남편 그늘에서 살림에만 전념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가정에 관한 한 모든 책임을 다 짊어지려고 하셨던 것 같다. 거기다 혼자 월남하신 분이라 남쪽에는 일가친척이 아무도 없어서 표현은 안 하시지만 늘 외로우셨을 거다.
자라면서 나는 아버지의 깊은 허무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후에 나에게도 찾아왔는데, 그건 부대 안에서 계급 간의 위화감, 한계, 차별 같은 것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아버지가 나를 군인 자녀를 위한 고등학교에 보낸 것은 큰 실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