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짧은 머리에 흰 러닝셔츠, 국방색 각진 모자와 빳빳하게 다린 군복을 입고, 아침이면 마루에 걸터앉아 유난히 코가 반짝이는 새까만 군화 끈을 오랫동안 꿰셨다. 퇴근하셔서 대야에 물을 받아 발을 씻을 때면 햇볕이라곤 쬔 적이 없는 것처럼 희디흰 다리에 털이 무성하고, 발은 희다 못해 푸른빛이 돌았다.
흰 얼굴에 코가 크고 넓고 푸른 턱수염이 있는, 아직 주름도 깊지 않은 40대 초반의 젊은 얼굴.... 기억 속의 나의 아버지는 결코 늙지 않으신다.
농담도 없고 우스개 소리도 안 하시지만 술 한 잔 들어가면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를 하염없이 부르며, 웃으시는지 우시는지 밤새도록 껄껄껄 하셨던 아버지.
이젠 그 목소리도 기억할 수가 없다.
우리 오 남매를 한 줄로 앉혀놓고 혼내시는 이유는 딱 두 가지.
엄마 말씀 안 들었다는 것과 형제끼리 싸웠다는 것. 아마 이 남쪽에 유일한 핏줄들이 혹 멀어질까, 헤어질까 노파심이 크셨던 것 같다.
언니와 나는 싸우고 나서도 이불속에서는 꼭 마주 보고 자야 했다.
모처럼 쉬시는 일요일이라고 해서 아버지가 낮잠을 주무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휴일에 뭘 하셨을까?
우선 집안을 둘러보셨다. 파리채를 들고 뒷짐을 지고 집안을 구석구석 살펴보셨다.
안방 건넛방 뒤란 부엌까지, 장롱 문도 열어 보시고 방문도 흔들어 보시고 벽도 두드려 보시고 찬장 문 경첩도 만져 보시고 뒤주도 열어 보셨다. 여름이면 파리가 보이는 족족 파리채를 탁 내리치시고 모기장을 확인하셨고 겨울이면 구멍 난 창호문을 바르시고 구들을 확인하셨다.
우리 집은 무엇인가가 오래 고장 나 있을 수 없고 파리도 아버지를 피해 다녔다.
집안을 돌아보신 다음, 언니와 내 책가방을 여시고 모서리가 구겨진 교과서와 사전을 일일이 펴 주셨다.
연필을 뾰족하게 깎아 주시고 책받침과 공책, 지우개가 제대로 있는지 점검해 주셨다.
지나간 일요일에도 하셨던 일을 이번 주 일요일에도 똑같이 하셨다.
그리고
가끔 일요일 저녁이면 소불고기를 먹게 해 주셨다.
숯불 풍로에 구멍이 송송 난 둥그렇고 노란 양은 불고기 판을 올려놓고 양념한 불고기를 얹으면 지글지글 맛있는 냄새가 온 집안에 가득했다. 우리 남매들은 젓가락을 들고 고기를 뒤집는 엄마 손을 따라가며 침을 삼켰다.
특히 불고기판 아래에 고이는 국물에 밥을 비벼 먹으면 밥 세 그릇도 먹을 수 있었다.
엄마는 궁중에서 요리하셨다던 외할머니 손 맛을 물려받았는지 음식을 맛있게 하셨다. 아버지는 비계가 잔뜩 든 엄마의 돼지고기 김치치개를 무척 좋아하셨는데 우리는 소불고기와 만둣국이 제일 맛있었다.
아버지는 자식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에 흐뭇해하시면서도 한 번도 맛있니? 하고 물어보지 않으셨다.
"희야~"
더운 여름날
아버지가 다정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부드럽게 언니를 부르셨다. 휴일에 언니를 부르시는 날은 좋은 일이 생기는 날이다.
뭔가를 사주시는 날이다.
아버지에게 돈을 받아 언니와 나는 주황색 플라스틱 바가지를 들고 큰 길가에 있는 아이스크림 공장으로 뛰어갔다.
막대기 팥아이스크림을 한 바가지 사 와서 질리도록 먹었다.
그중에 하나는 꼭 짠맛이 났다.
그 시절 아버지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우리 아버지도 무척 무뚝뚝했는데 자식들 먹이는 일에는 신경을 쓰셨던 것 같다.
그래도 나는 딸과 친한 아버지가 좋았다.
내가 제일 부러워한 친구는 아버지와 어깨동무를 하고 걷는 우리 반 친구 윤순정이었다.
순정이는 어리광을 부리며 아버지를 올려다보고, 순정이 아버지는 예뻐 죽겠다는 눈빛으로 순정이를 내려다봤는데 그 장면이 너무 부러워서 고개를 돌릴 지경이었다.
아버지가 우리를 나무랄 때
-이누무 자식들이.
하고 시작하는 소리가 싫었고 이 호통 소리에 찍 소리 못하는 것이 슬프고 화가 났다.
무섭고 엄한 아버지를 가진 게 참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정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아버지는 어울리지 않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손은 크고 하얬는데
그 하얗고 큰 손으로 우리 도꾸리세타를 떠 주셨다. 장갑도 아니고 머플러도 아니고, 목까지 올라오는 따뜻한 도꾸리를.
그것도 한 가지 색으로만이 아니고 두 가지 색을 배합해서 말이다.
주로 빨강과 베이지색 털실로 뜨셨는데 심각한 표정을 지으시며 긴 대바늘을 양손에 들고 검지 손가락을 굽혔다 폈다 하셨다.
겨울이면 뚝딱 몇 개의 도꾸리를 떠 주셔서 싫으나 좋으나 입고 다녔다.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가 뜨개질하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 마음속엔 다정과 사랑이 넘치도록 차 있었는데, 체면상 그런 것들이 새어 나오는 걸 꾹꾹 누르셨는지도 모르겠다.
세월이 흘러 연세 지긋해지시면 그런 알콩달콩한 것들을 간직만 하고 있기에는 과부하가 걸려 시나브로 흘러나올 순간이 틀림없이 있었을 텐데 무엇이 급한지 일찍도 가버리셨다.
너무도 오랫동안 불러 보지 못해 이제는 나와는 상관없는 단어가 되어버린 아버지....
그립다.
엄마방에 걸려있었던 40 초반의 아버지와 엄마의 사진.
엄마는 젊은 아버지와 영원히 젊은 부부로 머물고 싶으셨나 보다.
엄마는 새파랗게 젊은 그 사진을 영정 사진으로 쓰고 싶어 하셨다(결국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엄마는 굳게 믿으셨다.
아버지는 엄마를 죽어서도 책임지셨다고.
엄마 안여사는 아버지 강상사가 순직의 대가로 남긴 미망인 연금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경제적 어려움을 겪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 연금은 자식들을 위해서도 쓰지 않으셨다.
연금은 곧 아버지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은 엄마만 책임지신 게 아니었다.
자식들은 보훈대상자로 대학까지 학비 전액을 면제받게 해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