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 이끈 길

여행의 묘미

by 평화

3년 전, 나는 혼자 서울로 떠났다.
1박 2일, 단 하룻밤의 외박이 포함된 짧은 여행이었다.
운전면허는 있었지만, 장롱 면허증인 초보 운전자이기에 마음 편히 차를 몰고 떠나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기차를 타고, 전철을 타고, 걷기만으로도 충분한 여행을 계획했다. 원래 도보 여행을 좋아했고, 걷는 일에는 자신이 있었다.

서울여행에서 정해둔 건 딱 두 가지였다.

숙소와 첫날 저녁 친구와의 약속.
여러 곳을 검색하다가 ‘보안스테이’를 선택했다. 경복궁 앞, 보안여관 옆에 새롭게 조성된 복합문화공간으로, 갤러리와 책방, 숙소가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마음을 끌었던 이유는, 통창 너머로 경복궁 담벼락이 한눈에 들어오는 침실 풍경과, 공용 거실에 비치된 책들 때문이었다.
게다가 보안여관은 문학 동인지 [시인부락]이 만들어졌던 장소이기도 했다.

시가 머물던 공간에 하루 묵을 수 있다는 건 왠지 마음을 설레게 했다.

짐을 풀고 우산을 챙겨 친구와의 저녁 약속 장소로 향했다. 비가 내리는 서촌 골목길을 걷는데, 작은 예술공간들이 곳곳에 스며 있었다.
저녁을 먹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경복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야간 개장이 있는 시기라 예매를 시도했지만, 이미 매진이라 체념했었는데, 비 덕분이었을까. 운 좋게 취소표를 구할 수 있었다.

경회루_2022

경회루 앞, 비 내리는 연못가에 한참을 서 있었다.
왕과 신하들이 연회를 즐기던 모습을 상상했다. 연못 위에 대칭을 이루며 비친 경회루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만큼 아름다웠다. 시간이 멈춘 듯한 밤이었다.

궁을 나와 친구와 카페에 앉아 쌓인 이야기를 나눴다.
중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교 졸업까지 내내 같은 반이었던 H는 여전히 나를 있는 그대로 응원해 준다. 학창 시절 내내 반장을 하고, 국회에서 일했던 그녀는 늘 내 삶이 더 자유롭고 가치 있다고 말해준다.
어릴 때부터 뭐든 호기심 많고 이것저것 시도하던 나를 좋게 봐주고, 요즘도 너무 열심히 사는 내가 안쓰럽다며, 가끔은 좀 쉬어가라고 조언한다.
그녀와의 대화는 언제나 편안하다. 무엇도 숨길 필요 없고, 가식도 필요 없다.
서울에 가면 꼭 H를 만나는 이유다. 그녀도 힘들 땐 내가 생각난다고 말한다. 그 말이 고맙고 따뜻하다.

그라운드시소 서촌_2022

이튿날, 서촌에 있는 ‘그라운드시소’를 찾았다. 원래는 박노수 미술관에 가려 했지만 휴관이라 어쩌나 고민하다 우연히 발견한 공간이었다.
원형 건물 중심에 중정을 둔 구조로, 안을 빙 돌아 전시를 관람할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의 갤러리였다. 당시엔 '사랑'을 주제로 한 사진과 영상이 전시 중이었는데, 사진이라는 매체가 가진 힘을 다시 느꼈다.
사진은 통념을 깨고, 솔직하게 인간의 이면을 비춘다. 그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말하지 못한 감정까지도 포착해 전한다.

전시를 보고 서촌 골목을 걷고 있는데, 인스타그램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누나, 지금 서울이에요? 저 좀 보고 가요!”
대학 후배였다. 서울에서 시내버스를 운전하고 있는 친구인데, 경복궁 사진을 보고 연락을 한 것이다.
새벽 근무를 마치고 오후엔 시간이 된다기에,

근 10년 만에 얼굴을 마주했다.
참 이상했다. 오랜만인데도 우리는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예전처럼 편하게 이야기하고, 웃고, 헤어졌다.

나는 여행을 치밀하게 계획하지 않는다.

특히 지난번 서울 여행은 더욱 그랬다.
그저 떠나고 싶었고, 잠시 쉬고 싶었을 뿐이다. 닿는 대로 걷고, 우연히 만나는 것들에 마음을 열었다.

인생도 그러하다.
안 되는 일을 억지로 붙잡는다고 방향이 바뀌지 않는다.
집착할수록 미궁으로 빠지기도 한다.
우연히 마주한 골목의 미술관, 운 좋게 관람한 밤의 경복궁, 그리고 십 년 만에 만난 후배까지.
인생은 결국 우연의 연속이다.
그리고 그 우연이 거듭되어 만들어내는 인연,
그것이 어쩌면 인생의 가장 큰 묘미가 아닐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너를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