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곧 사람이고, 삶이다

한글날을 맞이하여

by 평화

책이 좋고, 문학이 좋아서 선택한 것이 국어국문학과였다. 대학에서의 배움은 단순히 문학의 감동에 머물지 않았다. 수업을 듣고, 졸업논문을 쓰고, 방언조사를 다니며 자연스레 언어학이라는 분야에 눈을 뜨게 되었다.

특히, 방언학은 내게 특별한 매력을 주었다. 살아있는 말, 삶의 방식이 녹아든 말, 지역의 정서를 고스란히 담은 말들이 신기하면서도 따뜻하게 다가왔다.

학과에서는 매년 겨울, 강원도 영동 지역으로 방언 조사를 떠났다. 강릉 옥계 마을에서 2박 3일을 머물며 어르신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눴다. 표준어 단어나 문장을 읽어드리면, 그것을 어떻게 방언으로 말하는지를 적고 녹음하고 분석했다. 낯선 마을, 낯선 집 문을 두드리며 3인 1조로 조사 활동을 했던 그 시간들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 삶의 중심 어딘가에 ‘언어’라는 키워드가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졸업논문 주제로는 ‘거제 지역의 물고기 방언’으로 정했다. 대학 졸업논문이니 그 내용이나 양이 소논문에 가까웠지만, 방언에 대한 애정을 담아 열심히 썼다. 거제도 어판장에 찾아가 직접 선장님들과 대화하며 조사했다. 지도교수님은 흑산도 방언을 연구하셨던 터라, 내 논문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주셨다. 대학원 진학을 권유해 주셨지만, 나는 취업을 선택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 공부를 더 이어갔다면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든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언어에 대한 애정은 결국 다른 방식으로 내 삶 속에 녹아들었으니까.

또 생각나는 추억으로 대학 시절 한글날 행사도 빼놓을 수 없다. 가장 많은 학생이 오가는 건물 2층에 책상을 펴고, 한글날 맞이 삼행시 짓기, 순우리말 퀴즈 등을 진행했다. 많은 학생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참여해 주었고, 그 모습을 보며 우리말의 소중함을 함께 나누는 보람을 느꼈다. 영어 사용이 점점 확대되는 시대에, ‘우리말과 글을 알고 제대로 쓰자’는 작은 외침이었지만, 그 의미만큼은 크고 분명했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말에 대한 관심은 사회에 나와서도 이어졌다. 청소년수련관에서 근무하면서, 요즘 청소년들의 언어문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 욕설이나 비속어가 아무렇지 않게 오가는 현실 속에서, ‘말의 힘’을 함께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렇게 시작된 사업이 바로 ‘우리말보라’였다. 2021년부터 3년간 이어진 이 사업은 청소년 언어문화 개선을 위한 활동이었다.

첫 해는 신조어와 비속어가 우리말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고, 말의 힘이 때로는 사람을 해칠 수도 있음을 함께 고민했다. 둘째 해에는 실생활 속 외래어와 외국어를 조사하고, 이를 우리말로 바꾸는 연습을 했다. 마을 간판을 조사하며 “이 단어는 이렇게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하는 모습이 참 기특하고 고마웠다. 마지막 해에는 강원도 지역의 사투리를 주제로 활동을 진행했다. 영서와 영동 지역 사투리를 비교하고, 지역 사투리 보존회를 탐방하며 우리가 사는 지역의 말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 매년 진행한 청소년 대상 설문조사를 통해 그들이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꾸준히 들여다보았다.

얼마 전, 작은 아이와 남편과 함께 음악을 듣다가 우연히 힙합 노래를 고르게 되었다. 요즘 가요는 힙합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노래가사에 영어가 많고 속도가 빨라 가사를 알아듣기 어려웠다.
음악을 함께 듣던 아이가 말했다.
“엄마, 요즘 노래 가사는 영어가 진짜 많잖아. 그런데 예전 힙합 노래는 영어가 별로 없네 ”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 힙합 노래나 가요들은 지금도 줄줄이 가사를 외울 수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대부분의 노래가 한글 가사였기 때문이다.

물론, K-pop의 세계적 흐름 속에서 외국어 사용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글로벌한 팬층을 고려한 전략이라는 것도 이해된다.

또 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말에도 외국어나 외래어가 꽤 많다. 대체 불가능한 말이 아니라면 우리말로 써도 될 텐데... 하는 생각이 드는 경우도 있다. 이런저런 생각에서 더 나아가 우리말이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건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말은 나의 정체성이자 삶의 근간이며, 문화이자 역사이다. 한 개인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사용하는 가장 익숙한 언어이기에, 오히려 그 소중함을 쉽게 잊게 된다.
익숙함은 때로 소홀함이 된다.

K-컬처가 세계를 향해 뻗어가는 지금, 우리말도 함께 빛날 수 있기를 바란다. 외국어를 잘하는 것이 자랑이 되듯, 우리말을 제대로 알고 바르게 사용하는 것도 멋진 자산이 될 수 있다는 걸 많은 이들이 느끼면 좋겠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바다의 어부들, 윌리엄 터너가 남긴 질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