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수상의 주변부와 밑바닥에서
"페미니즘과 PC주의 사상에 물든 북유럽 좌파들이 여성 작가라는 이유로 상을 준 것. 심각한 역사 왜곡이며 한국에 대한 관심은 사실 없다.
"김대중 전 대통령처럼 정치적 이유로 받았을 뿐이다.
국내 우파들은 이 같은 관점으로 대한민국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을 정의한다. 그들은 한림원이 좌파 사상에 찌든 데다, 'DE&I'(Diversity Equity and Inclusion. 모든 사람에게 다양성·형평성·포용성이 적용돼야 하며, 소수자의 위치에 놓인 집단에 대한 차별을 지양하고 공정한 대우의 필요성을 촉진하려는 서구 지식인들의 문화와 풍토를 일컫는다.)의 적용 범위를 넓혀 노벨상까지 확장했다는 주장을 제기한다. 따라서 한림원이 노벨문학상 수상 이유로 "역사적 상처에 직면"했다고 설명했으나 한국의 역사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정치적 사유로 상을 줬다는 주장도 덧붙인다. 한강 작가가 페미니즘 담론을 유지하는 아시아 여성 작가라는 점에 매력을 느끼고, 5·18등 한국사를 의도적으로 곡해한 채 작품을 통해 역사 왜곡을 한다는 설명을 가미한다. 한림원의 입맛에 들어 맞았으니 실제 역사가 왜곡돼더라도, PC주의+페미니즘이 21세기 시대정신과 근접한 주류 담론이기에 이를 옹호하려는 의지를 한강의 수상을 통해 관철했다는 부연이다. 혹자는 이런 의견에 대해 일견 설득력 있다고 판단할 수도, 강력히 옹호하고자 각종 논변을 제시할 수도 있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좌파와 우파로 갈려 소모적 논쟁을 일으켜야할 대상이 됐다는 현실에 뒷맛이 씁쓸하다.
국내 우파는 과거의 망령으로 남은 공산주의가 PC주의+포스트모더니즘+페미니즘와 결탁해 21세기에 모습을 바꿔 부활했다고 믿으며 이를 비판한다. 그러면서 문화계가 좌파들로 잠식됐으니 역사 왜곡이 없는 무결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지닌 이른바 '우파 예술'의 중흥이 시급하다고 한다. 그러나 특정 사상에 대한 안티 태제로 형성된 사상은 자생력이 없기 마련이다. 물체에 투과된 빛이 없어지면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 혹여 진실로 '우파 예술'의 갈급함을 느낀다면 '건국 전쟁'이나 '박정희 뮤지컬' 같은 수준 낮은 시도를 자랑스러워하지 말았어야 한다. 나는 국내 우파들이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깎아내리는 처사가 실상 막다른 길에 놓인 자신들의 처지에 대한 자조적 푸념이라고 판단한다. (국내 좌파도 이에 상응하는 중대한 문제가 산적했으나 이 글에선 우선 우파들만 지적하기로 한다.)
한강의 작품들이 페미니즘 색체가 확연하기에 논란이라는 주장도 살펴보자. 이는 국내 우파들의 사상적 토대가 일천하다는 점을 드러내는 데 더해 고루하다는 점을 폭로할 뿐, 별다른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메리 울스턴 크래프트로 시작돼 서프레지트 운동과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거쳐 주디스 버틀러의 현대 담론에 이른 페미니즘의 계보에 대해 무지하다는 뜻이다. 21세기에 페미니즘에 온정적이지 않은 여성이 대체 어디있단 말인가. 현대에선 여성들의 문학에 페미니즘의 색체가 묻어나오지 않는 게 오히려 흥미를 갖고 탐구해야 할 주제다. 페미니즘은 가치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하늘은 파랗다', '밤은 어둡다', '소금은 짜다' 같은 방식의 현상적 접근이 요구된다.
이는 우파 전반에 표표히 흐르는 페미니즘 자체에 대한 과도한 강박증-병리학적 거부 반응 탓에 명제에 대한 발생학적 오류에 빠져 바람직하지 않은 논거를 제시한 것이다.
만약 시몬 베유 같은 여성이 국내 우파에 등장해 현대 페미니즘의 내재적 문제와 은폐한 질문에 대해 지적한 뒤 한강의 작품에 대해 쓴소리를 퍼부었다면, 나는 해당 담론을 사뭇 진지하게 받아들였을 테다. 노동의 최전선에서 생생한 현장을 겪은 뒤 작성한 그녀의 수많은 에세이는 시대의 반항아 까뮈의 존경까지 불러일으켜 그의 품 속의 노트로 오랫동안 간직하게 했을 정도니까.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김대중 전 대통령처럼 정치적 이유로 받았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잃는다. 영화에선 장 뤽 고다르와 문학에선 조지 오웰이 자신의 창작이 '정치 활동'이라는 논지를 펼쳤다. 인간의 사회 활동에서 정치적이지 않은 행위는 없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라고 한 것처럼 말이다. 정치는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는 교과서적 의미에서도 사회를 존속하는 핵심이자, 보편적 행위다. 다만, 직업 정치인들이 정치의 중요성을 망각한 채 국회 안팎에서 벌인 '정치질의 향연' 탓에 좌우를 막론하고 '정치질'과 정치를 동일시한 나머지, 대다수가 상반된 개념을 단일한 의미로 여기게 됐다. 이로써 정치 자체를 과정이 아닌 목적으로, 가치 판단의 대상으로 설정하는 허구적 돌담을 쌓다 무너트리길 반복해온 것이다. 국내 우파는 실제로 삼삼오오 모여 등산과 산책을 즐기지만 여러 돌담을 완성하려는 태도가 부족해 보인다.
한강의 문학이 객관성이 결여된 역사 왜곡이라는 주장도 물음표가 찍힌다.
역사 왜곡에 대한 견해도 근시안에 빠져 자신들의 규율에 사로잡힌 채 교조적 태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한 요리 프로그램에서 나온 말을 인용해보자면 '역사를 해석하는 방식은 다양함으로 시야를 열어야'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영화 '라쇼몽'에선 동일한 사건을 두고 남편, 부인, 도둑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한다. 숲 속 시골마을에서 벌어진 단순한 강도 사건의 속성을 규명하는데도 각자의 시점에서 바라본 세계가 객관적일 수 없기에 혼란은 가중된다. 성경 역시 마가·누가·마태·요한복음 등 예수님의 공생애와 부활에 대해 서술하나 형식과 내용적 차이를 보이며 묘사하고 있다. 역사에 대한 전문 지식이 없더라도 특정한 역사적 사실이 온전히 객관적일 수 없다는 점은 현대 사회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않는다는 것을 국내 우파들도 이미 알고 있을 테다. 고유한 사건을 기술하는 행위에는 이를 작성한 기자의 선험적 판단이 들어간다는 점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더욱이 국내 우파들이 호감을 표하는 일본의 걸출한 역사 소설가이자 사마천의 '팬보이' 시바 료타로도 마찬가지로 고증에 최대한 충실하려고 시도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하는 데 대해 회피하지 않는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대한민국의 문학이 세계로 향할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기념할만 하다. 그간 국내에선 이상, 백석, 윤동주 등 뛰어난 문학인들이 많았고, 다소 늦은감이 있으나 이제서야 인정받아 대한민국 문학사를 대표해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결실로 이어졌다고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노벨문학상 수상을 얄팍한 이데올로기로 치부해 해석해버리는 국내 우파의 가치관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이들의 신념 체계 중 하나에는 '세상이 포스트모던 하지 않다'는 완고한 믿음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현대에선 이 같은 주장이야 말로 담대한 외침이자 거대한 도전에 직면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문학에선 제임스 조이스, 회화에선 마네와 모네, 철학에선 쇼펜하우어와 니체가 서구의 유구한 정통과 반대되는 결과물을 내놓으면서 수천년간 이어진 엄격한 객관주의에 망치질을 가했으며, 후설의 현상학에서의 에포케 이후 들뢰즈, 보드리야르, 라캉-지젝의 사상이 현대를 장악했다는 점을 간과하거나 외면하고 있다. 물론 현실과 역사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각 사건들을 파편화한 이후 도식화한 구조로 엄밀하게 탐구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예컨데 프랑스 혁명 등 인류 역사의 분기점이자 이정표를 제시한 사건이 시작부터 숭고한 사명을 띄고 약동했는지, 그저 배고픔을 견디다 못한 민중들이 빵을 부르짖다 볼테르와 루소의 화려한 글과 대단한 '이빨'에 홀려 동조된 성취인지에 대해서는 해석의 차이로 남는다.
그러나 국내 우파들이 진리에 접근하려 분투하며 치밀한 전개를 펼치는 논리주의자가 아니라는 점도 분명하다. 국내 우파가 한강을 향해 쏜 화살을 정신분석적으로 조망하면 자신들을 무능에 절규하며 한탄하는 목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국내 우파의 사상적 뿌리를 제공한 이승만-박정희로 표상되는 이데올로기조차 사실 이데올로기 없는 이데올로기 덩어리로 구성돼 있다. 그야말로 '홍철 없는 홍철팀'인 셈이다. (이를 들뢰즈의 기계와 신체 없는 기관의 열화판으로 봐도 흥미롭다.)두 명 대통령의 탁월한 업적에 따라 국내 우파들은 자신들의 사상을 예리하게 연마해 좌파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한꺼번에 겨냥해 공격할 수 있는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21세기에 호응할 수 있도록 사상과 개념을 진화시킬 가능성과 잠재력에도 우파의 토양과 기반을 창조하지 못했다. 설혹 국내 우파의 중심부에서 자본주의가 막강한 위세를 떨치던 당시 아인 랜드의 폼을 장착해 객관주의의 유산을 되살려낼 정도의 패기를 뿜어냈더라면, 이번 에세이가 세상에 나올 일은 없었을 것이다. 실오라기 걸치지 못한 사상적 토양 위에 세워진 국내 우파에 애도를. 유약하며 깨지기 쉬운 국내 우파의 사상적 발전을 진심으로 염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