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봄, 엄지혜 작가의 <까다롭게 좋아하는 사람>, <태도의 말들>을 곁에 두고 오래 읽었다. 두 권 모두 ‘관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데, 읽는 동안 나의 마음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문장들을 만날 때마다 읽기를 잠시 멈추고 노트에 옮겨 적거나 떠오르는 단상을 기록했다. 그렇게 책이 전하는 이야기를 천천히 읽어 나갔다.
느리게 읽으면서 발견하는 것들이 좋다. 작가가 공들여 썼을 단어와 문장 속을 유영하며, 그가 살포시 꺼내놓은 마음을 알아차릴 때 나의 영혼은 충만해진다. 작가가 여러 문장들 틈에 넣어둔 이야기를 발견하고 그것에 답을 하는 과정은 마치 보물을 캐는 것처럼 짜릿하다. 특히 막연하게 느끼던 감각이 작가의 유려한 문장으로 마침내 표현되었을 때의 기쁨은 얼마나 큰지! 이것이 내가 살아 숨 쉬는 문장들을 후루룩 읽고 지나가 버릴 수 없는 이유이다.
나에게 걷기는 책 읽기와 비슷하다. 자연과 바깥 사물들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그것들의 질감을 느끼고, 때로는 향기를 맡고, 그들 사이로 통하는 바람 소리를 듣는 여유는 천천히 걷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평소 성취에 대한 압박을 자주 느끼는 나는, ‘도착하는 것을 지연시키는 방식으로’ 걷는 동안 쪼그라들었던 마음에서 조금씩 해방된다. 길 위에서 스치는 사람들, 자기의 속도대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나무를 바라보는 사이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기 시작한다. ‘걷는 걸음의 숫자만큼 나 자신을 짓누르는 감정들을 버리기로 한다’는 이제니 시인의 문장이 떠오르고 비로소 평안의 순간을 맞이한다.
/벚꽃 피는 계절에 태어난 아이/
/다 떨어진 꽃잎이 안타까워 지나치지 못하는 아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느리게 걸으며 길어 올린 에너지를 기억하자고 다짐한다. 자연의 걸음이 그렇듯 서두르지 말고, 가끔은 속도를 늦춘 채 삶이 보내는 기쁨의 순간들을 가만히 바라보자고, 그것들을 놓치지 말자고. 그렇게 천천히 걸으며 수집한 작고 아름다운 순간들이 어쩌면 진짜 행복일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