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글씨-내게 글쓰기는?

날카로운 일상 속 일들을 조용히 토닥이며 정리하는 시간

by 해나 이미현

국민학교 4학년, 작고 여리고 아무것도 잘하지 못한다고 스스로를 깎아내리던 시절이 있었다. 늘 주눅이 들어 있었고, 내 안에서는 말 못 할 불안이 자라났다. 말이 많지도 않았고, 특별히 뛰어난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루하루를 그저 묵묵히 버티듯 살아가던 어린 날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선생님께서 내 일기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해나는 글씨도 이쁘고 글을 참 잘 쓰는구나. 참 편하게 읽어진다. 너의 일기는.”

그리고는 내 일기를 도내 일기 쓰기 대회에 한 편 출품하여 작은 상 하나를 수상하게 해 주었고 그 일기는 우리 학교 문집 ' 파란 마음, 하얀 마음'에 실리게 되었다.


그 한마디가, 그날의 목소리가, 내 마음에 한 줄기 빛으로 스며들었다. 암흑 같은 방 안에서 갑자기 창문이 열리고 햇살이 들어온 듯한 기분이었다. ‘어? 내가 글을 잘 쓴다고? 글씨도 예쁘다고?’ 믿을 수 없는 마음으로 되뇌었다. 그렇게 작은 칭찬 하나가, 그때까지 내가 가진 모든 ‘나는 아무것도 못해’라는 생각을 흔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일기를 더 자주 쓰게 되었다.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어도 좋았다. 그냥 내 일상, 내 마음,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차곡차곡 기록했다. 그때는 몰랐다. 그 기록이 훗날 나를 지탱하는 뿌리가 될 줄을. 어린 시절, 선생님의 그 한마디는 나를 ‘글을 쓰는 사람’으로 이끄는 시작점이었다.


교사가 되고 나는 여전히 기록을 멈추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그저 쓰는 행위 자체가 나를 살게 했다. 힘들 때마다, 외로울 때마다, 답답할 때마다 글 앞에 앉으면 조금은 가벼워졌다. 글은 나의 대화 상대이자 숨구멍이었다. 내 글들은 싸이월드에, 네이버 블로그에, 카카오 스토리에, 밴드에.... 종이 일기장에 산발적으로 쌓여 있다. 좋아요 하트가 달린 글들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가까운 벗이 먼저 브런치 작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 벗이 내게 말했다.
“네가 안 쓰면 누가 쓰니? 시작해 봐.”

그 말이 또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고 있던 어깨를 펴게 했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내어 브런치 스토리 작가의 길을 시작했다. 글을 올리자 며칠 안되어 작가가 되었다는 팝업창이 떴다. 처음에는 두렵기도 했다. 누군가 내 글을 읽고 혹시 실망하지는 않을까, 내가 과연 쓸 만한 이야기가 있을까, 마음속에서 수많은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한 편, 두 편 올리다 보니 알았다. 나는 누군가를 감동시키려 쓰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살아 있게 하기 위해 쓰고 있다는 것을. 내 글을 읽고 공감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덤이요, 기적 같은 선물이라는 것을.


이제는 출간 작가라는 새로운 꿈을 꾼다. 언젠가 내 이름이 적힌 책이 누군가의 손에 들려 있을 모습을 상상한다. 그리고 그 책이 또 다른 어린 날의 ‘나’ 같은 사람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너는 쓸 수 있어. 너의 이야기는 소중해.’라는 메시지를 건넬 수 있기를.


돌아보면, 내 삶은 늘 ‘말’보다 ‘글’로 더 선명해졌다. 남들이 쉽게 지나치는 일상도, 글로 옮기면 내 안에서 새로운 빛을 발했다. 글은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방식이었고, 나를 존재하게 한 증거였다.

어린 시절의 나는 스스로를 너무 작게만 보았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안다. 여리고 작다고 해서 무가치한 것이 아니고, 조용하다고 해서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글을 통해 세상과 연결되는 법을 배웠고, 글을 통해 스스로를 안아주는 법을 배웠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쓰기로 한다. 화려하지 않아도, 대단하지 않아도 좋다. 내 마음속 이야기를 한 줄, 한 줄 풀어내며 나는 살아간다. 그리고 언젠가, 내 글이 누군가의 골방에 스며드는 빛이 되기를 꿈꾼다.


선생님의 작은 칭찬이 내 인생을 바꾸었듯, 누군가에게 나의 글이 작은 용기가 되기를 바라면서.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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