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날 때면 "한국인"으로 나 자신을 구분 짓지 않는다. 단 며칠이라는 주어진 시간으로 이 나라에 합법적으로 머물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한 몸이 되어 정취를 만끽하려 한다. 그래서였을까. 비교적 농익음이 물어있고 잔잔한 감성이 풍겨오는 동네나 공원에 엉덩이를 내려놓는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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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는 시간이 마무리가 되고 버선발로 달려오는 언니를 맞이했다. 5일이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속에서 만난 언니는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한국이 아닌 일본에 있었기에 가능했던 감정이지 아닐까 싶다. 각자의 자리에서 쉬지 않고 달려온 우리에게 주어진 꿀 같은 자유시간. 서울에서 팔짱을 끼고 거리를 활보했던 옛 추억이 떠올라 우리의 첫 행선지는 시부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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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시부야로 가기 위해서는 야마노테선에 몸을 실어야 했었는데, 이 노선은 시부야뿐만 아니라 신주쿠, 하라주쿠 등 많은 여행객들이 찾는 그야말로 "핫한" 장소들의 집합채였다. 우여곡절 지하철에 올랐지만 벌써부터 온몸에 진이 빠져나갔고 이렇게나 많은 일본인들 사이에서 부대껴본 것도 처음이었다. 차라리 우리나라 2호선 출퇴근길이 더 나을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으로 정신줄을 꽉 잡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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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발을 내딛기 힘들 정도로 움직이기 힘들었다. 괜히 옆에 있는 언니를 잃어버릴까 서로의 팔짱에 의지한 채 엄청난 인파를 뚫기 시작했고 기대했던 높은 빌딩과 전광판, 스크램블 교차로가 눈앞에 펼쳐졌지만, 감탄보단 한숨이 먼저 터져 나왔던 우리였다. 전 세계 사람들을 이곳에 한 대 모아놓았나 싶을 정도로 이토록 많은 인파는 내생에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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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불에 멈춰 서서 가만히 이들을 응시해 보니 방 한 칸 웅크려있던 지난 3년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빼앗긴 자유와 억압된 생활에 대한 갈망이 이러한 모습으로 터져 나온 것이 아닐까. 나 또한 이곳 시부야에 그들과 함께 있는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한숨이 안도의 신호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이 부대낌이 싫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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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에 빠질 수 없는 건 단연지사 당충전. 일단 먹고 봐야겠다. 건너편 솔솔 풍겨오는 달콤한 냄새. 개코인 내가 놓칠 수 없지! 언니를 꼬드겨 딸기 파르페를 하나 주문했다. 부드러운 반죽과 촉촉한 생크림의 향연. 피날레로 딸기까지. 입 안에서는 교향곡이 연주되고 있었고 좀 전의 고단함은 잊어버린 채, 채워지는 달콤함으로 금방 기분이 좋아지던 단순한 나. 그래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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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에 잠시 기대어 파르페를 먹어치운 후 본격적인 쇼핑에 나섰다. 겉옷이며 바지 그리고 모자까지. 해외에서 쇼핑을 하다 보면 면세혜택이 있어 비싼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내 머릿속에 합리화라는 도파민이 분비돼 과소비를 부추긴다. 가벼워진 지갑을 보니 일말의 죄책감이 들었지만, 시부야에서의 쇼핑은 나름 기분 좋은 유흥이 돼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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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소비 속에서도 채워지지 않은 허기짐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아디다스 신발. 신발을 좋아하는 나로서, 일본에 오게 된다면 가장 사고 싶은 아이템이었다. 인기 있는 신발은 한국에서 워낙 비싸게 거래되고 모델도 없기 때문에 일본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많은 후기들을 찾아보니 일본에서의 쇼핑이 훨씬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이 좋지 않았던 걸까, 내 눈에만 보이지 않았던 걸까. 그렇게 시작된 "신발 찾아 삼만리. “ 3만 보 넘게 걸어 다녀보았지만 마음속에 품어왔던 신발은 도무지 찾을 수 없었고 점점 굳어지는 언니의 표정만이 아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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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움과 속상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던 나는 입술이 댓발 나온 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발 뒤꿈치가 다 까져 절뚝거리며 따라오는 언니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좀 전의 활기찬 모습은 온데간데 사라져 버린 채 무거운 공기만이 우리를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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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워진 하늘을 따라 텅 빈 뱃속도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초밥을 먹으러 가던 도중 축 쳐진 고개를 들어 눈앞에 펼쳐진 반짝이는 야경들을 보니, 문득 놓치고 있던 순간들이 정말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소중한 자매여행이었지만, 언니와 눈을 맞추고 웃으며 대화를 나누기는커녕 한 발치 저 멀리에 언니가 있었고 일본 특유의 전경들을 음미하지 못한 채 그냥 지나가버렸다. 터지는 헛웃음에 뱉어버린 한마디.
"나,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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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자매였는 지라, 초밥집에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나니 조금 전의 짜증과 피로도 금세 풀려버렸다. 신발을 향한 아쉬움은 그저 내 마음속 깊은 곳에 고이 접어준 채, 다시 언니의 팔짱을 끼고 서로의 올라가는 입꼬리를 바라보았다. 흘러가버린 시간을 다시 주어 담을 순 없지만 이내 아쉬웠던 나는 남은 시간이라도 최선 다해 채워보려 노력했다. 배부름에 기분 좋아질 수 있는 우리라 참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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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도쿄에는 비가 계속 내렸다. 홀로 흐린 하늘만 바라보니 날짜를 잘못 맞춰서 왔나 싶을 정도로 답답하고 우울했다. 하지만 언니가 온 뒤, 거짓말처럼 하늘은 다시 맑아졌고 삭막했던 내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역시, 혼자보단 둘이 좋다. 시부야에서의 기록이 비록 첫 장에 소나기가 내렸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무지개가 드리워진 우리의 여행일기. 비 온 뒤, 맑음 시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