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기숙사 떨어졌어, 어떡해?”
이 말이 첫 시작이었다.
60만 원 주고 산 면허증을 갖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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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이 되기 전 코찔찔이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20살이 되면 운전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다.
굴러가는 바퀴 있겠다, 든든한 에어백 있겠다,
도대체 뭐가 무서운 건데?
이 대담함이 지금까지 유지되면 좋으려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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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필기시험
운전면허를 딴 사람이라면 무조건 깔아 본 흔적이 있는 “운전면허 Plus”.
굳이 남다른 길을 걷고 싶지 않았다.
오른쪽? 왼쪽? 많은 사람들이 오른쪽 길을 걸었다면 풀밭은 어느새 길이 터 직진방향을 가르쳐 줄 것이고, 적어도 뱀을 만날 확률이 낮으니까.
컴퓨터가 20개가 놓여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바로 옆 모자를 푹 눌러쓴 내 또래의 여자아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휙휙 운전면허 문제집을 넘겨가며 새삼 분주해 보였다. 순간 굵직한 침이 목구멍을 타고 꼴깍 소리를 내며 내려갔다. 초라한 내 손에 뭐라도 쥐여주고자 연신 무릎을 비볐다. 숨 한 번 고르고 눈이 뒤에 달린 것 마냥 뒷좌석에 앉은 사람들을 재빠르게 스캔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단연 나의 이목을 끈 스포티한 남자아이. 분명 나와 같은 또래일 것이다. 뭐가 그렇게 자신만만한지 무심한 표정을 하고 한쪽 다리를 의자 옆에 삐죽 빼고 다리를 덜덜 떤다.
시험이 시작되었고 고요함 속 클릭 소리는 누가 먼저 결승선에 들어가나 치열한 100m 달리기 시합과 같았다. 시험이 끝나고 합격의 기대감과 불합격의 불안함이 아슬아슬하게 공존하던 찰나, 70점 합격.
합격 문구를 봄과 동시에 나의 왼쪽 어깨는 백두산, 오른쪽 어깨는 한라산이 불끈 쏟아 오른 듯 한 뿌듯함이 온몸을 지배했다.
합격 도장 쾅-!
2. 기능시험
인생 첫 재수의 시작.
처음 운전면허 학원에 간 날이었다.
큰 키에 수려하신 외모, 지긋한 나이, 인자하신 웃음까지 운전면허 선생님을 딱 본 후 처음부터 마음이 놓였다. 운전대를 잡고 시동걸기, 깜빡이, 라이트, 직각주차, 돌발 구간, 가속 등 연습장 5바퀴는 족히 돌았다. 선생님께서는 처음 운전하는 거 치고 운전을 매우 잘한다며 엄청난 칭찬세례를 퍼부으셨다(?)
원래 학원생들 기죽지 말라고 칭찬해주시는 건가? 조금은 의구심이 들었지만,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듯 그 순간 나는 베스트 드라이버이자, 이곳은 기능 시험장이 아닌 선생님과 해안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시험은 오전에 치러졌고 나는 일곱 번째로 운전대를 잡게 되었다.
꾸르륵, 시작됐다. 과민성 대장 증후군.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라는 미친 존재감을 가진 이 아이는 고삼 일생 최대의 예민한 시기에 얻게 되었다. 항상 긴장하면 쏜살같이 달려오는 친구, 아니 원수.
배를 부여잡고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는 찰나, 4번 탈락! 5번 탈락!
전봇대인 줄 알았던 확성기는 시험장을 뛰어넘어 전 국민이 들을 수 있을 소리로 탈락임을 각인시켜주었다. 드디어 내 차례 다가왔고 나는 브레이크 밟으며 시동을 켰고, 기능적인 부분들 완료해 서서히 출발했다. 마치 거북이 마냥 느린 속도로 앞발을 내딛으며 경사로 구간까지, 모든 게 순조로웠다. 서서히 내려와 좌측으로 핸들을 꺾는 순간. 자동차는 이미 차선 넘고 있었다. 한 번 감점이 시작되고 나니 식은땀은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고 옆 차선, 앞 차선을 볼 겨를도 없이 중앙선을 넘자 바로 탈락 소리가 울려 퍼졌다. 드디어 내 운전면허 종이에 빨간 줄이 그인 것이다.
탈락 후 엄마 아빠 그 누구도 아닌 운전학원 선생님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많은 용기를 주셨고 가르침에 보답하지 못했다는 마음에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가장 속상한 건 나니까.
연습했던 코스와 많이 달랐다는 위로로 푹 꺼진 자존감에 공기를 불어넣어 빵빵하게 채웠다.
다행히 일주일 뒤 재시험을 치렀고 시험 보기 전 나의 대장에게 자유를 주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운전대를 잡고 약간의 감점은 있었지만, 막힘없이 시험을 치렀다. 그때 울려 퍼지는 합격의 종소리.
됐다! 해냈다 김현아!
합격 도장 쾅-!
3. 도로주행
운전면허 시험의 꽃이자 극악의 난이도 “도로주행”
그의 악명은 너무나도 유명해 잔뜩 겁부터 먹었다.
“연습만이 살길이다.”
하지만, 기능을 딴지 얼마 되지 않아 운전면허 시험장과 학원에 코로나 확진자들이 급속도로 생겨나 밖을 나가기 꺼리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코로나에 대한 우려 50%와 도로주행에 대한 두려움 50%로 인해 운전면허증 따기 프로젝트는 장기전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코끝이 알싸하게 시린 2월이 지나고 무채색이었던 바깥도 점점 색을 찾아가는 봄도 지나고 있었다.
매미의 울음으로 시작을 알리는 무더운 여름에 운전면허증 따기 프로젝트는 다시 생기를 얻기 시작했다. 멋진 말로 포장해보지만, 결국 학원비 때문에 그동안 애써 무시해왔던 도로주행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일반도로를 달린다고 생각하니, 겁부터 났다. 그래도 나의 목을 옥죄어 오는 면허증의 족쇄를 끊어내고자 연속 3시간 수강을 끊어버렸다.
도로주행을 가르쳐주신 선생님은 셔링이 달린 분홍색 블라우스와 낮은 구두를 신으신 중년의 여성분이셨고, 그녀의 화사한 모습이 나의 긴장감을 다독였다.
약 2시간가량 수업과 휴식을 진땀 나게 반복한 후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학원 내에 구내식당이 있어 모든 선생님들도 그곳에서 식사를 하신다. 오늘 점심은 굶겠거니 하며 복도 끝 의자에 앉으려는 순간, 선생님께서는 나의 손을 잡고 식당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낯가림이 심한 나는 다른 선생님과 식당 아주머니들께서 보내는 시선에 익숙지 않았고 모르는 사람들과의 겸상은 최악이었다. 하는 수 없이 선생님을 따라 식판을 들고 음식을 조금씩 담았다. 밥 조금, 오징어 채 조금, 불고기 조금. 순간 선생님이 엄마처럼 느껴졌다. 엄마의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가는 아이처럼 낯선 곳에서의 선생님은 나의 유일한 보호자이자, 엄마였다.
연수를 마친 후, 내가 아는 인맥 중 최고의 드라이버이자 20년 넘은 경력을 가진 아빠를 초빙했다.
우선, 나의 교수님 유튜브를 통해 A코스, B코스, C코스, D코스를 정주행 했고 아빠 만을 의지한 채 도로주행 연습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도로에 진입 한 순간 긴장감은 극에 달한다. 액셀을 밟아 앞으로 속도를 내야 하는 상황, 내 오른쪽 발은 제 집 마냥 브레이크를 향해간다. 속도 40Km. 아빠의 울화통이 터진다.
“부우웅! 밟아! 붕!!” 어느새 자동차로 빙의해 버린 아빠. 내가 달리는 건지, 아빠가 달리는 건지.
“부우 우 우웅!” 아빠의 입에선 어느새 한국어가 사라지고 엑셀 소리가 주를 이루었다. 연습을 마친 후 이마에 맺힌 땀방울, 축축하게 젖어있는 겨드랑이와 엉덩이. 한 여름 숨 막히는 한증막 사우나에 들어갔다 온 기분이었다.
이틀 뒤 도로주행 시험 코스 A를 배정받게 되었다. 의외로 자신감이 있었고 출발도 좋았다.
정말 그뿐이었다. 출발한 지 1분, 우회전을 하기 위해 그대로 핸들을 꺾은 순간 나는 광탈을 하게 되었다.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렇다. 우회전을 돌기 전 브레이크를 한 번 밟아 멈추고 움직여야 했다.
3초 컷. 여태까지 경험했던 일 중 가장 허탈하고 허무한 일이었다. 허무하다는 말이 이럴 때 쓰이나 보다. 그렇게 또다시 재수의 길로 접어들었다.
삼일 뒤 또다시 운전면허시험장에 등장했다. 이번에는 D코스. 다른 코스들 보단 자신 있었고 재수인지라 어느 정도 감은 익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재수의 단점은 긴장감이 2배라는 것.
브레이크 한 발에 몸은 앞으로 튕겨나갔고 핸들을 돌리는 부분에서 양팔은 X자로 꺾여버렸다. 긴장감의 전류가 옆자리 평가하시는 분 까지 흘렀는지 긴장감 풀라며 어깨를 다독여주셨다. 순간의 따뜻함이 얼어붙은 손과 발을 녹여주었고 무사히 코스를 마칠 수 있었다.
평가가 시작되고 합격증을 받아낸 순간.
합격했다는 기쁨은 의외로 기분이 좋아 하늘 높이 방방 뛰어오르는 느낌이 아니라 마치 신발 속 들어있는 돌멩이를 빼낸듯한 개운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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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19로 인해 이번 학기 수업은 비대면으로 전환하겠습니다.”
온 세상 수업이 비대면으로 전환되자 운전면허증도 자연스레 지갑 안에서 봉쇄되었다.
비대면이 길어질수록 운전면허증은 마스크 속 코와 입처럼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꺼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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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벅이 생활 2년 차.
운전하라고 하면 언제든 할 수 있다는 거짓된 자존감 속에 그렇게 장롱면허가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