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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경재 Aug 04. 2024

영월에서 부친 편지

사람이 없는 삶은 흐르지 않는 강물과도 같습니다

나는 영월을 참 좋아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산 좋고 물 좋은 곳이 많아 한 군데를 여러 번 가는 경우는 별로 없는데 나는 영월만 다섯 번을 갔다 왔습니다. 물론 서울과 멀지 않다는 이유도 한몫했을 것입니다. 영월에는 산도 있고 강도 있고 마을도 있고 역사도 있습니다. 영월은 조용하나 침묵하지 않고 산 중 속에서도 단절되어 있지 않습니다.

영월에는 청령포가 있습니다. 강물이 곡선을 그리며 강 속의 섬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곳에는 노송과 단종 처소가 천연히 어우러져 있습니다. 가혹했던 운명이 무색하게 청령포는 고요하고 아름답습니다. 나는 이곳을 천천히 거닐며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거친 생각이 정리되고 마음이 고요해지는 느낌입니다.

영월에는 김삿갓문학관이 있습니다. 영월군 남쪽 소백산맥 자락의 계곡을 따라가다 보면 김삿갓 묘역과 문학관이 나옵니다. 이곳은 방랑자로 살아갔던 그의 삶의 자취와 시를 소박하면서도 잘 보여주고 있는 곳입니다. 때론 거친 풍자로 때로는 처연한 감상으로 삶을 오롯이 살아왔던 한 인간의 정신을 느낄 수 있어 참 좋습니다. 그 문학관 옆 계곡을 맑은 계류가 흐르고 있습니다. 두메산골 골짜기에 청명하게 흐르는 계곡 물이 파란 하늘 아래 문학관의 소박한 건물과 어우러지는 것을 보고 있지면 그 많은 근심들이 씻기는 듯합니다. 김삿갓이 자신을 기리는 문학관이 이곳에 세워졌다는 것을 안다면 분명 마음에 들어 했을 것입니다.

영월에는 어라연이 있습니다.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잣봉을 지나면서 나무 사이로 비경이 힐끗힐끗 보이다가 곧 어라연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첩첩산중 아래 푸른빛으로 흐르다 커다란 바위를 부드럽게 돌아 다시 푸르게 만나는 장면은 우리나라 최고의 비경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내가 꼽는 진짜 비경은 그곳을 내려와서 동강을 따라 걷는 길입니다. 때로는 넉넉하게 흐르다 때로는 세찬 물결을 일으키며 자연의 율동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강을 감싸며 산이 달리고 햇빛이 강물 위에 부서지는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답습니다. 이 길은 여름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길게 자란 잡초가 무성해서 흐르는 동강의 시야를 가리기 때문이다.

영월에는 동강이 있습니다. 동강과 나와의 인연은 오래되었습니다. 어렸을 적 엄마와 기차 여행을 가기도 한 곳입니다. 중학교 때는 동강에 대한 시를 써서 액자에 넣어 집에 걸어 놓기도 했습니다. 어른이 되어 여러 번 영월을 찾은 이유는 사실 동강이 있기 때문입니다. 동강은 너무 넉넉히 흐르지도 그렇다고 빈약하지도 않습니다. 산을 휘돌다가 마을과 만나고 다시 이내 산 자락으로 흘러가는 모습이 그리도 자연스럽습니다. 동강은 예나 지금이나 그 모습 그대로 멈추지 않고 흘러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동강을 보며 언제나 삶을 생각했습니다. 강물은 흐르고 인생은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영월에는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언젠가 홀로 동네 식당에서 된장찌개에 소주 한 잔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식당 아주머니의 인자한 미소가 여운처럼 남아있습니다. 약간의 취기가 오른 상태로 식당에서 나와 시원한 바람을 따라 강 길을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호기심에 그곳으로 향했는데 마침 마을의 작은 음악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공터에 열댓 개의 간이 테이블을 세우고 작은 무대에 무명의 가수와 밴드들이 노래를 하고 있었는데 이곳 주민에게는 오래 기다려왔던 축제 같았습니다. 오륙십 명의 관객은 대부분 나이 드신 분들이었는데 가끔 젊은 남녀와 아이 엄마들도 보였습니다. 그곳에 외지인은 나밖에 없어 보였습니다. 가수들도 전부 영월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하였습니다. 한 참을 서서 보다가 맥주를 하나 시키고 빈자리에 앉았습니다. 모두들 신나 보였습니다. 공연이 한창일 때 이십 대처럼 보이는 예쁜 두 명의 여자가 와서 자리에 앉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테이블 옆에 오십 대가 넘어 보이는 중년 남녀가 있었는데 자연스럽게 합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치 친구처럼 서로 너무 즐거워하며 서로 소주잔을 기울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밴드 음악 소리에 맞춰 일어나더니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젊은 이들이 넘쳐나는 서울에서는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보며 나는 더 외지인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삶 그리고 사람. 이 작은 영월의 음악회에서, 유행도 화려함도 보이지 않는 스쳐 지나가는 어느 순간에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그것을 분명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실패와 성공, 영광과 좌절, 시작과 끝, 상처와 치유, 증오와 사랑 그 모든 우리 인생사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생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 아닙니다. 상처도 없을 것이나 사랑도 없을 것입니다. 야속하게 흘러가기만 하는 시간 속에서 유일한 의미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없는 삶은 흐르지 않는 강물과도 같습니다. 우리의 삶이 맑게 흐르기 위해서는 사람과 함께 해야 합니다. 아름다운 영월의 풍경이 그리워 찾았다가 작은 마을의 저녁 풍경이 가장 아름다움을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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