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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장님!! 어디 계세요!!

당신이 그리운 날이에요...

by 강나봉

이번 생에 두 번 다시없을 줄 알았던 회사생활을 재개하며 제일 먼저, 연습을 한 것은 ‘마음 다스리기’였다.

업무는 쌩 초짜면서 나이로 밀어붙이는 위계 또는 어쭙잖은 자존심등... 그 따위에 8살 어린 회사 선배를 뱁새눈으로 바라보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했다. 무엇보다 하나라도 더 받아먹기 위해선 나의 위치를 정확히 인지하는 것이 필요했다.


다행인 건, 육아를 하며 몸소 깨달은 삶의 이치들이 큰 도움이 되었다는 거다.

첫째, 30살 넘게 차이나는 비글 자매들에게도 배울 점이 많다는 것.

둘째, 아쉬운 사람이 주변 도움을 얻기 위해선 뱁새눈은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

셋째, 손예진처럼 날 때부터 반달눈이면 좋았겠지만 그렇게 생기지 못한 바,

눈꼬리 내리는 연습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 등이다.

게다가 세상은 야속하게도 해마다 ‘아쉬운 사람’ 상위 랭킹에 나를 선정했기에,

유혹과 멀어지는 불혹의 나이에도 갈수록 야생의 생존본능만 강해졌다.


한때 나는 비글자매를 산과 들을 누비는 자연인으로 키웠기에 학원 정보라느니 교육에는 무지했다.

때가 되면 할 거라고, 억지로 받아먹다간 체하기 마련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2호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친해진 친구들이 영어를 일찍 준비한 덕에 꽤나 실력자들이었다.

때때로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벙어리가 되는 2호를 보며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건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했지만, ‘저학년까지 조금만 더 놀아도 되겠지’란 생각으로 나만의 교육철학을 이어갔다.

그런데 2호의 발언에 1호의 경악스러운 시선이 꽂히며 나의 철학은 개똥이었음을 곧 알게 해 주었다...


"엄마!! 나도 이제 영어 잘한다? 드래건이 영어로 뭔지 알아?"

"응? 드래건이 영어로???"

"응!!! 훗... 알려줄까? 요~오~~~~옹~~~"


2호가 한껏 혀를 굴리며 '요오오옹'이 영어라며 굉장히 뿌듯한 얼굴로 내게 알려주자,

함께 이야기를 듣던 1호가 갑자기 사뭇 진지해지더니 영어학원을 다니겠다고 했다.

직감적으로 망했음을 느낀 2호 역시 언니를 따라 영어학원을 가겠다고 했고, 배움에 임할수록 본인의 실력을 느낀 아이들은 이제는 드래건이 알파벳 dragon으로 되는 과정에 목말라했다.

좋은 엄마 프레임에 갇혀 있던 나는, 양과 질은 모른 채 아이들은 무조건 놀기만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성장하는 아이들을 따라 성취욕과 승부욕도 함께 자라고 있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지난 자연인의 삶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육철학이라는 것이 내 기준이 아닌 피교육자 기준이어야 한다는 생각의 전환을 하게 되었다. 또한 이후 내게 주어진 운명은 문명화를 꿈꾸는 비글 자매를 위해 반달눈으로 학원정보수집에 촉각을 세워야 한다는 것임을 깨달았다.


입사 이후 한 달가량 눈팅만 하던 내게 드디어 업무가 할당됐다.


“이번엔 턴키(turn key : 시작부터 끝까지 책임지는 것)로 계약해서 할 게 많아. 온라인광고가 문젠데...

어차피 우리도 다 모르니 강대리가 한번 해봐, 온라인광고 대행사 담당자 연락처 줄게.”

"네!!!"


제작물 위주의 작은 광고사이기에 온라인광고 담당자가 전무한 상황이었고, 결국 외주를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우리 쪽에서 컨트롤해야 하는 사람이 필요했고, 그 업무를 첫 임무로 내가 맡게 됐다.

담당자 연락처를 저장하고 뜬 프로필 사진을 보니 너무 앳된 얼굴의 20대인 듯했다.

김대리인 그녀와는 전화로 간단한 통성명을 하고 앞으로 업무에 대해 논의를 시작했다.


“강대리님, 먼저 랜딩페이지 구현되어있어야 하고요, 광고소재에 대한 제한사항을 지켜서 해주셔야.... 저희가 노출을 최대한.... CTR을 높여서..... ROAS가 최적의 성과를 낼 수 있게.....”


‘멍하다... 드래건이 잉글리시인지, 용이 잉글리시인지 헷갈리는 지경까지 왔다.’

이러다 때려치우고 애나봐라, 월급루팡아, 김여사야 등등등 원치 않는 부캐를 무한 생성해 낼 것 같았다.

통화를 대충 마무리하고 급히 검색을 해서 검색광고마케터 1급 자격증 책을 주문했다.

뭔지는 몰라도 용어는 알아야 했기에 받자마자 달달 외우기 시작했다. 이해가 안 되면 유튜브 설명을 출퇴근 시간에 들었다. 마케터들을 위한 오픈 채팅에도 참여해 뭣도 모르면서 무작정 질문을 해댔다.

드디어 용을 영어로 드래건이라고 말할 수 있는 단계가 되었다. 자신만만해하며 다음 통화를 기다렸고, 이야기하는 내내 한결 편하게 알아듣는 스스로가 대견스러웠다. 그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구나 감격했다.


"네네~ 그렇게 진행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소재 통과되면 다시 연락드릴게요, 아 그리고 강대리님! 카페 배너 광고도 진행하신다고 했는데, 그럼 배너 디자인은....~~"

"아, 디스플레이광고 기준으로 해주시면 되고......~"


이야기는 절정을 지나 끝을 달려가고 있었다.

나의 마지막 한마디만 참았더라면 해피엔딩이었을 텐데.

"김대리님~ 그럼 카페배너는 누구에게 의뢰를 하나요? 방장님께 쪽지 보내면 되나요?"

"... 네?....."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방장님요? 방장님이 누구... 아.... 카페 매니저님 말하시는 건가요?"


10년 전에는 분명 카페지기를 방장이라고 불렀는데... 이젠 그냥 관리자 또는 매니저라고 불린다고 했다.

괜찮다. 억지로 먹어도 체하지만 급히 먹어도 체하는 사실을 깜박했을 뿐이다.

수화기너머 얼굴은 안 보이지만 이미 내 눈은 그녀를 향해 반달눈이 되었다.

이제 드래건을 알파벳으로 쓰는 걸 배우면 된다.


"김대리님~ 죄송한데, 카페 게재 방법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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