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와 박완서의 글을 보고.
요즘에는 자꾸만 교과서가 짓밟은 우리 문학의 영지가 눈에 보인다
그래서 문학 교과서에서 허구한 날 되새김질당하는 작가들의 전집을 읽는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허다한 날 어머니의 이름을 별 위에 새기는 윤동주 시인이며,
자전거 도둑에 그리도 많은 정을 주는 박완서 작가며
모두 우리 문학사에 모범생 같은 이미지를 내게 주는 작가들이다.
그런데 요런 작가들의 글을 전집으로 읽은 사람은 몇 안 된다.
가끔 윤동주 시인의 전집을 훌훌 읽다 보면
일제나 민족이나 시대의 영혼을 짊어진 무거운 얼굴 사이에
청년 작가가 으레 쓸 법한 센티하고 다소 난해한 글들이 보인다
이런 시들이 나오면 나는 마치 모범생의 책상 아래에서 엉뚱한 만화책을 발견한 마음으로
열심히 읽어내린다.
특히 윤동주 시인의 <간>이 나에게 그렇다.
코카서스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코카서스나, 침전이나, 프로메테우스나 모두 센치하고 어려운 낱말을 사용하는 그를 보며
어째서 나는 자꾸 웃음이 비죽비죽 새어 나온다.
그가 글을 못 씀에 있는 문제는 절대 아니다.
그저 그의 세계에 이런 심상이 있었다는 것이 너무 의외이며 정말 윤동주답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윤동주의 모든 시가 감히 민족을 노래한 시라고 말하는 사람이 너무나 싫어진다.
시인이 세상의 짐을 잠깐 옆에 두다 내쉰 한숨마저 '민족시'라고 말하는 지나친 시대론적 관점은 시를 망칠 수 있다.
소설도 매한가지다.
박완서 작가는 또 너무 여성 작가라는 말 안에 틀어박힌 사람이 되어버렸다.
어느 날 나는 박완서 작가를 평론한 여성학자가 박완서의 글을
"남성 중심사회를 거세게 비판하는 천의무봉의 작가"라고 했는데 이건 너무 실없는 소리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 여성의 허상을 날카롭게 가른 사람이다.
이건 그녀의 작품, <휘청거리는 오후>만 읽어봐도 다 알 수 있다.
<휘청거리는 오후>는 등장인물 허성 씨와 그의 아내와 일가를 중심으로 서술하는 소설인데
이 소설을 읽고 있으면 허성 씨의 아내, 오 여사를 작가가 얼마나 냉혈한으로 설정했는지 알 수 있다.
딸을 부잣집에 시집보내려고 혈안이 된 오 여사와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아버지를 '순수해 빠지'다고 말한 뒤, 돈을 좇는 결혼이 더 '합당'하다고 보는 오 여사의 맏딸, 초희.
다른 작품도 마찬가지이다.
<엄마의 말뚝>에서도 주인공의 발목을 잡는 것은 어머니의 소위 '신여성주의'의 맹신盲信이고
<도둑맞은 가난>에서도 주인공의 어머니는 집안에 돈이 한 푼도 나지 않으면서 사모님 소리를 듣겠다고 남편에게 회사를 차리라고 재촉을 하고 결국 집안을 풍비박산 내고 연탄가스를 피워 자살한다 (이 면에서는 멕베스와 아주 큰 유사점이 보인다.)
그러니까, 대체 여기서 어떤 부분이 여성을 옹호하고 남성을 비판하는가?
오히려 여성의 허상과 여성주의 운동의 한계점을 너무나 아프게 꼬집고 있는 작가가 박완서 작가이다.
박완서 작가가 아직까지도 '작가' (내가 작가에 따옴표를 붙인 것은 그녀가 여성 작가임을 이제 그만 붙이고 싶기 때문이다)로서 수많은 작품을 서가에 내걸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작가가 외딴 자전거 도둑에 연민을 붙인 것도 아니고, 모든 여성을 위한 대단한 권리 선언을 내건 것도 아니고
바로 자신이 겪은 여성으로서의 '체험'을 전달하기 위함이었고 이는 <박완서의 말>이나 여타 인터뷰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다.
물론 우리는 작가의 의도를 절대로 알 수 없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가 잘 못 해석됨은 알 수 있다.
이런 모범적인 작가들의 속 깊은 뜻을 볼 때,
나는 윤동주 시인의 센티한 시를 본 후의 감상과 다른 감정을 느낀다.
그것은 마치 내 자매가 다른 이름으로 불린 느낌이다.
마치 누가 내 가족의 이름을 박완서가 아니라 박이서 아니면 더 심하게는 박완으로 부른 모멸감마저 든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교과서가 짓밟은 영지들을 자주 지켜본다.
그리고 그곳에 어떤 잡초가 무성히 자라 나중에는 세상을 들어 올릴 말과 홀씨들이 될지
자주 눈여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