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의 글들.
한국 소설가와
한국어 소설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분명 한국 소설가는 한국에서 태어난 토종 한국인 또는 국적이 한국사람으로 인정되는 소설가를 지칭하고
한국어 소설가는 한국어로 소설을 쓰는 작가를 지칭할 것이다.
그런데 진정 한국어로 소설을 쓰는 세대가 점점 드물어가고 있다.
늘 박경리의 <토지>를 읽을 때, 나는 마치 입에 새로운 이가 돋듯이
내 안에서, 내 모국어의 혓바늘 사이에서 이런 놀라운 단어가 속속들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
그 어떤 언어의 마술이나 신묘한 라임rhyme보다 신기했다.
사실 이 점은 독자가 직접 판단할 수 있는 몫이다.
다음 장면은 토지 1부에서 봉순이가 제 팔자에 무당이 있음을 알고 장난으로 무당굿을 흉내내는 장면이다.
거리굿 한다고 음식을 차려놓고 수없이 혼신을 불러대는 봉순이,
영신靈神이 실리기라도 한 듯이 목소리는 낭랑했으며, 눈은 흥분에 번쩍번쩍 빛나고,
손짓 몸짓이 단순한 아이들 소꿉놀이라고만 할 수가 없다.
너무 진박眞迫하여 처연悽然한 귀기마저 느끼게 한다.
- 토지, 박경리. 마로니에북스, 65쪽.
마지막 문장이 정말 걸출하다.
'진박'(중생을 얽매어 해탈하지 못하게 하는 노여움의 번뇌를)하여 '처연'(외롭고 처절)한 귀기가
대체 무엇일까?
여기서 우리는 진박이라는 단어가 중생의 삼박과 갖는 연관성에서 곧 이 살풀이가 불교 신앙과 관련이 있음을 알고 중생과 노여움의 번뇌를 통해 어린 아이가 갖는 천진난만함과 삶의 번뇌를 교차하며 독자에게 살떨리는 병치를 준다.
생각해보아라. 티없이 맑게 웃는 아이가 돌아서서 외롭고 처절한 귀기를 내뿜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을씨년스러운 일인지를.
그 모습을 한 번에 정리하는 것이 이 문장인 셈이다.
아이가 곧 불교에 귀의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리 짧은 행에 담아내고 심지어 그 행간에 담긴 섬뜩한 기분이 마치 칼날처럼 이리저리 독자를 향해 휘두르는 이 문구는 무서우리만치 효율적이다.
효율적이다 못해 너무 토속적이기도 하지만 너무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이 엄청난 문학적 효율과 향토적 언어 그 사이에 정확히 박경리 작가의 문체가 놓여있다.
그래서 나는 박경리 작가의 언어 사용이 너무나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쓰는 언어의 팔할은 그녀의 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온몸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슬퍼하는 것과 안타까워하는 것과 원망하는 것과 처연해하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하염없이 작더라도 지나치게 치명적인 차이점이 분명히 자리하는 단어들이다.
슬퍼함은 가슴으로 지는 것이고
안타까움은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이고
원망하는 것은 두 팔과 가슴으로 땅을 치는 것이고
처연해하는 것은 온 몸으로 휘어지는 고통이다.
이 미묘하고도 명징한 차이를 박경리 작가는 학습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 어휘들이 서로 완벽한 색채로 분간될 때 나는 감탄이 멎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이 횡설수설하는 글을 마치려면
단 한 가지 방법 밖에 없을 듯 싶다.
그것은 박경리 작가에 대한 나의 평을 내리는 것인데
이건 나에게도 너무 가혹하고 그에게는 너무 하릴없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시시하게 결론내리려 한다.
박경리 작가의 책들은 나에게 새로운 모국어가 되었으며
진정한 한국어 소설이라 당부할 수 있다고,
이런 결론을 말하고 싶어 나는 이렇게 야밤에 죽치고 앉아 이 글을 썼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