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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길 May 03. 2024

일찍이 집가는 날

자유의 끝

 시험이 끝나고나면 소위 말하는 풀어지는 기간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 기간동안은 암묵적으로 공부를 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자유를 만끽해도 선생님이나 다른 타인이 그닥 터치하지 않는다. 나는 그 기간을 시험 본 다음주 까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기간이 금요일이 지난 오늘 시점에서 끝나버렸다.


 원래 금요일 날은 기숙사에서 9시까지 남아서 자습을 하다가 퇴실하여 집에 10시는 되어야 도착한다. 하지만 그 다음주 월요일날이 공휴일이라면 금요일 날에 조기 퇴실을 하게 된다. 어린이날은 일요일이지만, 월요일이 대체 공휴일이다. 따라서 조기퇴실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기숙사에는 고작 일주일 정도만 지내고 주말마다 나오기 때문에 집에 도착하였을 때 예전과의 괴리감이 크지 않다. 그래야 맞다고 생각했다. 허나 나는 일주일을 간격으로 세상의 변화가 느껴진다. 우리집은 아파트인데, 17층으로 상당히 고층에 산다. 따라서 집 창문으로 밖을 내다 보게 된다면, 멀리 있는 산까지도 보이며 옆을 둘러본다면 지하철 역까지도 보인다. 하지만 최근들어서 주변에 아파트 공사를 많이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공사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집에서 자연 풍경을 관찰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일주일을 간격으로 건설하기 시작한 아파트들이 점점 높아진다는 것이 느껴졌고, 이제 더 이상 우리집 창문으로는 산을 볼 수가 없다. 공사는 너무나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허무하다고 표현이 가능하지 않을까, 몇 십년을 보고 자랐던 풍경인데, 무엇이 생겨났다고 인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새로 생겨난 것이 나의 과거로부터의 연결고리를 차단시킨 것만 같다. 하지만 이 뿐만이 아니다.


 우리집 베란다에서 아래를 내려본다면 작은 산이 하나 있다. 그 산에는 나무가 빼곡하여서 태풍이 오거나 등등 강풍이 불거나 비가 많이 오는 날에 그 작은 산을 내려다 본다면 나무가 휘황찬란하게 움직이며 먹구름으로 인한 무기력에서 나를 위로해주는 존재가 되어주었었다. 하지만 이게 무슨 날인가, 기숙사에서 집으로 왔더니 빼곡했던 나무들이 다 밀려 있었다. 나는 그 충격을 어루어 말할 수 없었다. 누군가는 신경을 안쓰겠지, 하지만 다들 그런거 하나쯤은 있지 않은가, 삶이 고달프거나, 혼자 멍을 때리거나 혹은 명상의 시간을 갖는다던지 할 때의 장소. 나에게는 베란다에서 그 산을 바라보며 나무들의 칼군무를 지켜보는 것이 그것이었다. 허나 또 무슨 건물을 지으려는 것인지 나무가 다 밀려버리고, 창문 멀리 보이던 자연 풍경과 함께 내가 친구처럼 생각하던 존재가 사라져 버렸다. 이제 나는 움직이지도 않는 건물을 보면서 생각에 잠기는 순간들이 많아지게 되겠지.


 이러한 것들을 보면 만물은 다 똑같지만 다르게 느껴진다. 모든 것이 같지만 다르다. 분명 모두가 다른 각각의 존재이지만 어째서 같은 이치로 인식이 된다. 피상적으로는 모든 각각이 다르지만, 내면적으로는 모든 것의 본질이 비슷하기에 그럴 것이다. 내 삶에 녹아든 모습은 모두 다르지만, 삶에 녹아드는 순간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전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설 정도로 적응해버린다. 하지만 사람이든, 동물이든, 자연이 되었든간에 사라지는 건 한순간이다. 그리고 내 삶의 일부라 느꼈던 것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면, 누가 이상함을 못느끼겠는가, 누가 침울해지지 않겠는가, 적어도 나는 삶의 일부분이 떼어져 나간 순간에 잠깐이라도 우울에 잠기게 될 것이다. 하지만 더 잔인한 것은 우울에 잠겨있을 수만은 없다.


 김영하 작가의 소설인 살인자의 기억법에 주인공의 대사 중에 이런 대사가 있다.

 

"가장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아마 이 책의 명대사를 하나 뽑으라고 한다면 모두가 이 대사를 뽑을 것이다. 나 또한 같은 생각이다. 예전에 엄마 방에 있던 책장에서 제목이 흥미로워서 한번 읽었던 적이 있었는데, 내가 그 책의 모든 것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작가의 말 부분은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우리가 무서움을 느끼는 모든 것의 원동력은 시간에서 비롯된다느 것이다. 죽을 것이라는 것도 시간이 다 된다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렇고, 치매라는 것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억이 잊혀져 가는 것이고, 마찬가지의 이치로 내 삶에 녹아든 것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없어진다. 가장 무서운 것은 시간이다. 두려움을 느끼는 대상이라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란 녀석은 마치 자기가 하지 않은 것처럼, 자신은 아무 관련이 없다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 시간이라는 존재가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간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한다. 아마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이 그것이었을까? 뭐가 어찌되었든, 난 시간이라는 녀석이 너무 원망스럽다. 과학, 수학적인 측면에서는 시간이 4차원의 축일 것으로 추정하는 사람이 있다. 즉, 시간도 유동적으로 이동이 가능하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과거와 미래를 드나들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드나들면 뭐를 하는가? 우리가 지금 과거로 간다고 가정해보자. 우리가 미래에서 과거로 왔디는 것을 자각할 수 있나? 절대 그렇지 않다. 지금이 과거로 간다고 한들, 우리는 그저 태어난 순간에서 그 순간까지 살아왔다고만 느낄 뿐이다. 미래로 가는 것 또한 마찬가지의 이치다. 

 가장 당해낼 수 없는 존재는 역시 시간이라느 존재다. 시간은 만물의 미래를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으며, 우리를 조종하려도 든다. 그리고 우리는 그 컨트롤에 이끌려 삶을 살아가게 된다.


 옛날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찾는 과학적 법칙들이 신이 만든 세계를 알게되는 과정이며, 더 나아가 세계를 만든 신과 가까워지는 수단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말이 맞다고 해보자. 우리가 과학을 미치도록 연구한다고 신의 존재를 알 수 있을까? 창조자를 따라 잡을 수 있을까? 신이 만든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는 절대 창조주를 대면할 수도 없으며, 알게될 리도 없다. 그저 창조를 알게된다는 것에 한없이 가까이 가는 것이 고작일 뿐이다. 

 시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아무리 시간이라는 존재에 많은 생각을 기울이고, 시간을 연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결코 시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100%이해는 불가능할 것이며, 시간이라는 지배자의 아래에 위치한 피지배자라는 존재로 우리는 평생을 지내게 될 것이다. 허나 그렇다고 한들, 우리는 반항할 수 없다. 그저 순응하고 살아가야 하며, 자연의 이치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해야 한다. 내 삶의 태도는 그러하다.


 기숙사에서 집에 도착하며 창문을 보고 달라진 점에서 어쩌다 보니 내 글의 방향이 시간으로 향하게 되었다. 나의 글쓰기 과정은 상당히 즉흥적인 것 같다. 계획을 세우지도 않고, 방향만 설정하여 글을 쓰기 시작한다. 허나 글을 쓰다보면 방향이 바뀌기도 하고, 여러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글쓰기는 내 스스로 참 마음에 든다. 오늘은 시간에 대한 고찰을 많이 하였으니 잠을 자면서 하루를 마무리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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