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육아

아이 걱정은 하면서 아이를 돌보지는 않았던 이유(소소 26개월)

by 신니

소소는 웃음이 많지 않았다. 그것이 아이의 타고난 성격인 줄로만 알았다. 예외적으로 잘 웃는 경우도 있긴 했는데, 소소가 좋아하는 외할머니, 사촌오빠, 그리고 내 직장동료 K와 함께 있을 때가 그랬다. 나는 그게 그 세 명이 특별히 소소의 취향이기 때문일 거라고 편리하게 해석했다. 그게 성격 탓이 아님을 알게 된 건 나중의 일이었다.


소소가 22개월이 되었을 때 남편이 복직했다. 집에 있는 엄마는 재테크 공부를 한다며 아이는 뒷전이었다. 어쩌다 아이랑 놀아줄 때는 영어와 지식 주입이 위주였다. 아이는 혼자 책을 보거나 사운드 펜으로 영어책들을 찍으며 놀았다. 소소의 한국어와 영어 어휘력은 날로 좋아졌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두 돌 전후로 소소는 말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원래 말이 빨리 트였으니 이제 한창 문장 구사력이 늘 시기였지만 늘지 않았다. 어휘력은 솟구치는데 표현은 하지 않으니 밸런스가 안 맞았다. 점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소소는 잘 웃지도 않았고 낯가림도 심했다. 자기가 필요한 말만 간단히 했고 질문에도 거의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부분들에 대해 검색하니 걱정거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불안감이 성난 파도처럼 덮쳐왔다.


이제라도 아이와 잘 놀아주는 좋은 엄마가 되겠다고 나서 보았지만 가뜩이나 불안과 자격지심으로 가득한 상태에서 안 하던 걸 하려니 잘 될 리 없었다. 발버둥 치듯 스킨십을 늘려보았지만 아이랑 같이 뒹굴면 5분도 못가 지쳐버렸다. 그때의 내 모습을 보고 친정엄마가 말씀하셨다.

“너는 아이랑 노는 게 너무 억지스럽고 힘들어 보여. 너처럼 놀아주면 엄마가 지쳐서 금방 나가떨어져.”


사실 아이보다 상태가 심각한 건 나였다. 인터넷 검색창에 ‘아이가 전혀 예쁘지 않은 엄마’라고 검색할 땐 누가 볼 새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언제부터 이런 마음이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밤마다 아이를 안아주며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포옹은 어색했고 감정은 겉돌았다. 그때마다 속으로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라는 생각이 저절로 따라왔고 아기에게 말할 수 없이 미안했다.


“아빠는 소소를 엄청 사랑하시지. 세상에서 소소를 가장 사랑하는 건 아빠야.”

이것이 소소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말이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꼭 알려주고 싶었다. 저 말을 하는 순간만은 이 세상에 진정한 내 아이의 편이 있고 그가 내 아이를 지켜줄 거라는 생각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아이와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져 갔다. 급기야 어느 순간부터 아이가 흐릿하게 보일 때도 있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공포가 일었다. 자식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사랑하지도 않는 나는 괴물이고, 엄마가 괴물이니 아이도 필연적으로 망가지리라는 공포였다. 공포감이 극한에 달하자 나는 이성을 잃고 아이를 피하기 시작했다. 언제나 아이를 정확히 등진 위치에 자리를 잡고 종일 휴대폰으로 아이 상태에 대한 검색만 했다. 그러다 아이가 곁에 오기라도 하면 갑자기 벌떡 일어나 집안일을 시작했다. 아이는 완전히 방치되었다.


애초에 이 모든 일이 자격이 없는 내가 엄마가 되어서 일어난 것 같았다. 내가 사라지는 것만이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라 생각했다. 내가 없어지면 남편과 시누이를 훌륭하게 키워내신 시어머니께서 아이를 잘 키워주시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도 아이가 엄마 없이 자랄 거라 생각하면 그것 역시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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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상담일 창피함을 무릅쓰고 김날따 선생님 앞에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 계속 아이를 위해 검색을 하느라 육아는 뒷전이었어요. 요즘 아이 상태가 나빠 보여서 더 잘 놀아줘야겠단 생각이 드는데도, 아이 증상에 대해 종일 검색만 하게 돼요. 그런데 저는 왜 아이에 대한 걱정은 하면서 정작 육아는 하지 않을까요?”


스스로도 '저는 왜 육아를 하지 않을까요?'라는 질문이 황당하게 느껴졌고 '그럼 하면 되잖아?'라는 대답이 나올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선생님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사람이 걱정을 할 때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가 들거든요. 그래서 어떤 일에 대한 걱정을 하면 마치 그 일을 실제로 한 것처럼 착각해요. 동일한 에너지가 사용되기 때문이죠."


순간 눈앞의 자욱한 안개가 걷히는 느낌이 들었다. 앞뒤가 안 맞던 나의 행동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 내가 해온 건 ‘걱정’이라는 ‘가짜 육아’였던 거다. 여태껏 나의 모든 시간과 에너지는 ‘아이’가 아닌 ‘걱정’을 위해 사용되었다. 아무리 검색을 해봐도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답은 ‘아이’에 있는데 엄마는 엉뚱한 곳에서 헤매고 있었으니까. 아이와 놀아주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왜 늘 지쳐있는가에 대한 의문도 함께 해결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간의 나의 행동이 면죄부를 받는 게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앞으로 이 깨달음을 잘 적용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하지만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마침내 나의 육아에 실낱같은 빛이 비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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