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성 교수법 RT를 만나다(소소 28개월)
여름휴가에서 돌아오자 미리 예약해둔 새로운 발달센터를 찾아갔다. 처음 갔던 곳도 나쁘지 않았지만 한 군데쯤 더 가보고 싶었다. 상담 후 센터에서는 일단 우리 집 상황에는 RT 수업이 맞을 것 같다고 추천해줬다. RT는 쉽게 말해 전문가가 보호자에게 아이와 상호작용하는 요령을 가르쳐주는 수업이란다. 아이 앞에서 늘 길을 잃는 내게 아이랑 노는 법을 가르쳐준다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 자리에서 수업을 등록했다.
RT는 반응성 교수법(Responsive Teaching)의 약자이다. RT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부모가 일상 중에 영유아 아동과 효과적인 상호작용을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영유아의 인지, 언어, 사회-정서 발달을 증진시키는 중재 프로그램이다. < 출처 : 한국 RT협회 홈페이지 >
RT 첫 수업 시간, 미리 이메일로 제출한 아이와 엄마의 10분짜리 놀이 영상에 대한 리뷰가 이루어졌다. (이 영상을 찍을 때도 내가 예전보다 너무 잘 놀아줘서 아무 문제가 없다는 평가가 나오면 어떡하지 하는 고민을 했는데 역시나 기우였다.)
“엄마가 참 열심히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엄마가 너무 말이 많아요. 아이와 대화할 때 엄마의 발화 양이 아이보다 많으면 안 돼요. 소소가 말을 잘 안 하는 이유가 부모가 늘 한 발 앞서 말을 다 해주기 때문일 수 있어요. 그러면 아이는 굳이 말을 할 필요성을 못 느낄 수도 있거든요.”
길을 가다가 강아지가 보이면 “와, 강아지다!”라고 내가 먼저 말하고, “강아지가 빨간 목줄을 하고 있네.”라고도 내가 먼저 말했다. 그게 좋은 거라 생각하고 여태껏 그렇게 지내왔는데, 충격이었다.
RT의 기본 전략은 그저 아이가 하는 말과 행동을 똑같이 따라 하며 반응하는 거란다. 아이가 말을 안 한다면 행동이라도 따라 한다. 그리고 자세를 낮춰 아이와 눈높이를 맞춰 유지를 하라고 했다. 아이가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항상 엄마와 눈이 마주칠 수 있어야 한단다. 쉽고 간단하게 느껴졌다.
10분간 선생님의 시범이 있었다. 선생님은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계속 몸을 낮추고 앉아있었다. 눈은 줄곧 아이를 응시하고 입가엔 미소를 잃지 않았다.(잘 웃는 선생님이라 오하하 선생님이라 부르겠다) 그러다 보니 아이는 중간중간 어쩔 수 없이 선생님의 웃는 얼굴과 마주쳐야만 했다. 그 상태에서 선생님은 아이의 행동을 모방했다. 소소가 실로폰을 두드리면 선생님도 재빨리 실로폰을 하나 더 가져와 두드렸다. 소소가 인형을 들었다 놓으니 선생님도 인형을 얼른 들었다 놓았다. 소소가 말을 전혀 하지 않아 선생님은 아이의 행동만 계속 모방했다.
이번엔 내 차례. 쉬워 보였는데 시작과 동시에 난관에 부딪혔다. 자꾸 설명해주고 싶어 안달 난 엄마의 자아가 문제였다. 정말 이렇게 말을 안 해도 될까, 이게 진짜 아이에게 도움이 될까 하는 의구심을 억눌러야 했다. 소소가 장난감 캠핑카를 보고 '트럭'이라고 말하자 정정해주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 올랐다. 결국 참다못해 막판에 아이가 새로운 장난감을 탐색하며 “이게 뭐지?”라고 말했을 때 “이게 뭐지? 엄마도 궁금하다”라며 나름 살짝 추임새를 넣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어진 피드백에서 ‘엄마도 궁금하다’는 불필요한 말이었다고 바로 지적을 받았다. 딱 한마디 했는데 그런 것도 안 되는 거라니. RT의 지금 단계에선 아주 사소한 것도 설명하려 들면 안 된다는 걸 확실히 이해했다. 그래도 선생님이 수업 전의 엄마 스타일을 봤을 때 굉장히 말을 많이 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잘 참았다고 칭찬을 해줬다. 작아진 엄마의 자신감에 큰 보탬이 되었다.
그렇게 첫 수업을 마쳤지만 RT가 정말 아이의 말문을 여는 데에 도움이 될까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아이에게 최대한 말을 많이 해서 자극을 줘야 한다는 나의 생각과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단 시작했으니 배운 대로 해보기로 하고 우리 부부는 즉시 RT 전략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일단 할 말을 쥐어짜내던 부담이 사라지니 그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이제는 그저 아이가 말하거나 움직일 때를 기다리고 있다가 똑같이 하기만 하면 되니 훨씬 수월했다.
다음날 저녁 남편이 쓰레기를 버리러 밖에 나갔다. 마침 현관 밖으로 사라지는 아빠 뒷모습을 본 소소가 나를 쳐다보며 “아빠, 아빠”라고 말했다. 아빠가 어디 갔냐는 뜻이었다. 예전 같으면 “어, 아빠? 아빠 어디 계시냐고? 아빠는 쓰레기 버리러 밖에 나가셨어.”라고 친절히 설명해줬을 테지만 이번엔 꾹 참고 배운 대로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실제로 정확히 다음과 같은 대화가 진행되었다.
소소 : 아빠, 아빠
엄마 : 아빠, 아빠
소소 : 아빠, 아빠
엄마 : 아빠, 아빠
소소 : 아빠는
엄마 : 아빠는
소소 : (잠시 침묵) 지금
엄마 : 지금
소소 : (잠시 침묵) 뭐 하러 가셨지?
엄마 : 뭐 하러 가셨지? 아, 쓰레기 버리러 가셨어.
소소가 “뭐 하러 가셨지”를 말할 때 나는 귀를 의심했다. 엄마가 미리 알아서 설명해주지 않고 기다렸더니 아이는 이렇게 조금씩 끊어서라도 끝내 의사를 표현했다. 너무 감격한 나머지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그동안 조급한 엄마가 아이의 말할 기회를 가로챘구나 싶어 가슴이 먹먹했다.
이날 이후 이와 비슷한 패턴의 대화가 여러 번 이루어졌다. 그러다 아이는 뭔가 깨달았는지 어느 날부턴가 통문장으로 조금씩 말하기 시작했다. 단 1회의 RT 수업 후 엄마, 아빠가 RT 전략을 사용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소소는 말이 꽤 늘었다. 우리 가족은 앞으로 RT 수업을 열심히 믿고 따라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