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전히 흔들리지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소소 30개월)
RT 수업에서는 매주 작은 숙제를 내준다. 지난주 과제는 ‘활기차게 놀아주기’였는데 못해갔다. 역대급 이앓이로 하루 종일 떼를 쓰는 소소를 감당하느라 녹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자정이 넘어 퇴근했고, 나 혼자 밤낮으로 시달리느라 체력이 완전히 소진되었다. 너무 힘들어서 친정엄마께 SOS를 쳤고 친정엄마가 한동안 와계시며 살림과 육아를 도와주셨다. 그 덕에 나는 휴식을 취하고 떨어진 체력을 보충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 고비를 넘기자 새로운 문제가 찾아왔다. 어느 정도 컨디션이 회복된 내게 ‘주객전도병’이 도져버렸다. 주객전도병의 대표적 사례로는 지난 4월 재테크 사건이 있다. 당시 나는 부동산에 미쳐있었고 그럴수록 육아가 점점 더 서툴러지고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래서 육아 천재 친정엄마에게 비법을 배우겠다며 친정으로 갔다. 하지만 거기서 아이가 할머니와 즐겁게 놀자 나는 아예 육아를 할머니에게 일임해버리고 부동산 공부에 전념했다.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이번 주객전도병의 주제는 글쓰기였다. 원래 친정엄마를 초빙한 목적은 나의 체력을 회복해서 소소와 더 잘 놀아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느새 또 소소를 할머니에게 홀랑 떠넘기고 말았다.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핑계로 육아는 뒷전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RT 9회 차 수업일이 다가오고 있었고 나는 글쓰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내가 정신을 차린 건 수업 이틀 전이었다. 또다시 심각한 주객전도병이 도졌음을 깨달은 나는 남은 이틀간이라도 열심히 숙제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하필 이날부터 요란한 생리통이 시작되었고 결국 과제를 못했다.
골든타임. 육아서를 읽은 엄마라면 이 말의 뜻을 알 것이다. 인간 발달의 결정적 시기라는 36개월 이전. 특히 이렇게 어린 아기를 키우는 가정에서는 하루하루가 골든타임을 넘어 다이아몬드 타임이다. 그걸 놓치지 않기 위해 부모들은 안간힘을 쓴다. 나 역시 회당 6만 원이라는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며 그 대열에 합류했다. 그런데 엄마인 내가 딴 짓을 하느라 간단한 과제조차 못했다니, 그 정도로 아이를 전혀 돌보지 않은 것이다. 내가 엄마인가 쓰레기인가, 참담했다.
RT수업은 언제나 “지난 한 주간 어떠셨어요?”라는 오하하 선생님의 물음으로 시작된다. 나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솔직하게 숙제를 못했다고 할까, 아니면 그냥 적당히 했다고 둘러댈까. 적당히 둘러대면 그냥 평소처럼 수업이 진행될 것이다. 반면 책 쓰느라 숙제를 못해왔다고 말한다면? 선생님이 나를 경멸할 것 같았다. 겉으론 내색 안 해도 속으론 나를 한심한 인간이라고 생각할 거야. 육아서를 쓴답시고 깝죽거리면서 정작 육아는 내팽개친 미친 엄마라고 쳐다보겠지. 무엇보다도 이미 바닥인 엄마로서의 자존감이 지하실까지 떨어져서 영원히 헤어 나오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그렇지만 나는 진실을 말하기로 결심했다. 아이가 힘들어하는데 엄마인 내가 어디까지 가야 정신을 차릴 것인가. 욕이라도 실컷 먹고 충격요법으로 주객전도병에서 탈출해야지 싶었다.
“지난 한 주간 어떠셨어요?”
선생님의 일상적 질문이 사형 선고처럼 들렸다. 각오는 했지만 말할 때 차마 선생님의 눈을 볼 수가 없었다.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 심정으로 사실대로 고했다.
“저는 책 쓴다고 딴짓하느라 애를 돌보지 않았어요. 애는 할머니가 다 봤고요. 그래서 숙제도 못 했어요.”
말을 끝낸 뒤 떨리는 마음으로 선생님의 질책을 기다렸다. 그런데 선생님은 안타까워하면서도 의외의 말을 해주었다.
“4월에도 재테크 하느라 비슷한 일이 있었고 뒤늦게 각성했다 했잖아요. 얘길 들어보니 이번에는 자기가 한 짓에 대한 각성이 그때보다 훨씬 빨리 온 것 같아요. 각성에 필요한 시간이 줄어들었다는 건 엄마가 발전하고 있다는 거예요. 저는 긍정적으로 봐요.”
아, 이 한 마디가 나를 얼마나 용기 내게끔 했는지. 한껏 위축되어 있던 내게 그래도 예전에 비해 성장했다는 말은, 내가 평생 들은 가장 값진 말 중 하나였다. 그날 오하하 선생님의 말은 미리엘 주교가 장발장을 용서하며 준 은촛대였고, 나는 두 번째 기회를 얻은 도둑 장발장이었다. 다른 어느 날보다 수업에 더 집중했다. 용기백배하여 더 잘하겠다는 다짐을 했고 집에 와서도 평소보다 더 충실하게 RT 전략을 구사했다.
이후 ‘나는 육아를 못해, 나는 구제불능이야.’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이 일을 떠올렸다. 그럼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스스로 인지하지 못할 때에도 아주 조금씩이라도 발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일로 완벽한 결과를 얻지 못했더라도 발전하는 과정 자체로 가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