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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니 Aug 27. 2021

이번 정거장은 ‘엄마’입니다.

아기 생후 27개월에 뒤늦게 엄마가 되다.

 

  동해안 어느 시골에서 출발한 버스를 타고 학교, 취업, 결혼이라는 정거장에서 내렸다가 탔다. 떨리는 마음으로 결혼 정거장을 거치고 나니 버스에서 다음 정거장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이번 정거장은 ‘임신’입니다.” 

  임신이라. 난 몸이 안 아픈 데가 없고 자존감도 바닥인데 이런 내가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망설이며 버스에서 내리지 않는다. 그렇게 아이 없이 4년이 흐른 어느 날 옆자리에서 말없이 기다리는 남편을 보며 커다란 사랑을 느낀다. 이렇게 좋은 사람과 함께라면 잘 키울 수 있을지도 몰라. 인생 최대의 결단을 내려 임신 정거장에 하차한다. 얼떨떨한 마음으로 두리번거리는데 마중 나온 새 생명이 나를 향해 손을 내민다. 나는 그 손을 잡는다.

  

“이번 정거장은 ‘엄마’입니다.” 

  올 것이 왔다. 임신과 엄마는 패키지 코스라 임신 정거장에 내렸던 사람은 반드시 엄마 정거장에 내려야 한다. 엄마가 된다고 생각하니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생후 36개월이 평생을 결정한다는데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오감발달에 좋다고 하는 교구랑 책이 이렇게나 많네. 엄마표 영어도 공부해서 아기한테 영어로 말해줘야지. 


  그런데 각종 육아 정보를 섭렵하려니 검색에 제법 시간이 걸린다. 그 사이에 아기는 어쩐담. 그래, 남편이 육아휴직을 했으니 잘 보겠지. 나보다 남편 인품이 더 좋으니까 아기에게 더 좋은 영향을 줄 거야. 또 나도 아이를 위해 중요한 일을 하고 있잖아. 아기의 개월 수에 맞는 자극을 주는 게 엄청 중요하다니 어떤 정보도 놓치고 싶지 않아. 안 그러면 나 때문에 내 아이만 뒤처지고 말 거야. 

  “이번 정거장은 ‘엄마’입니다.”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어라, 이미 내렸는데 왜 또다시 방송이 나오지. 엄마인 걸 누가 몰라. 내가 지금 한 생명을 책임지는, 세상에서 가장 힘든 사람이라고. 

  그런데 아기가 왜 책대로 자라질 않지. 다른 집 애들은 색연필로 끼적인다는데 얘는 왜 색연필에 관심이 없을까. 얘는 왜 낯가림이 유난할까. 이 개월 수에 이런 걸 하면 혹은 안 하면 문제가 있는 걸까. 서서히 불안이 피어오른다. 아이의 행동 하나하나를 맘 카페에서 확인하기 시작한다. 검색에 몰두할수록 아이와의 시간도 점점 더 줄어든다. 


  “이번 정거장은 ‘엄마’입니다.”

  스피커가 고장이 난 게 틀림없다. 찜찜하게 왜 자꾸 엄마라고 강조하는 거야. 안 그래도 엄마 노릇을 제대로 못해서 마음이 괴로운데. 밤에 아기의 잠옷을 고르는 것조차 내게는 스트레스다. 얇은 옷을 입혀 재우면 새벽에 감기에 걸릴까 봐 불안하고 그렇다고 두껍게 입히자니 더울까 봐 한걱정이다. 어떤 선택을 해도 맘이 놓이지 않아 깊은 잠을 못 잔다. 나의 그릇된 판단 때문에 아이가 잘못될까 봐 불안하다. 결국 남편에게 아기 잠옷 입히는 일을 일임해 버린다. 남편은 나보다 합리적이니 아이를 춥거나 덥게 하지 않을 딱 맞는 옷을 선택할 거라 믿으며. 심지어 남편이 오래간만에 친구들과 술자리를 갖고 들어와 일찍 잠든 날에도 코를 고는 사람을 깨워 아기 잠옷을 입혀달라고 부탁한다. 


  얼떨결에 일어나 허둥지둥 옷을 갈아입히는 남편을 바라보며 나는 자괴감에 빠진다. 나는 왜 아기 잠옷 하나 못 갈아입히는가. 왜 이런 사소한 결정조차 못하는 걸까. 아이를 키우는 게 왜 이다지도 버거울까. 다른 사람들은 잘만 하는데, 왜 나만 이런 걸까. 남편도, 세상 사람들도 모두 날 한심하게 볼 거야. 다 하는 엄마 노릇, 왜 너만 못하냐고. 엄마가 이렇게 엉망인데 아이가 잘 클 수 있을까. 아이는 나 때문에 불행해질 거야. 아기와 남편에게 나는 없느니만 못한 존재야. 아니, 차라리 없는 게 나을 수도 있다. 난 잉여인간이야. 난 쓰레기야.    

  “이번 정거장은 ‘병원’입니다.”

  어라, 내가 왜 환자가 되었지. 참, 내가 쓰러졌었지. 그런데 왜 쓰러졌지? 음, 계속 입맛이 없어서 체중이 심하게 줄긴 했어. 근데 왜 입맛이 없어졌지? 음, 심적으로 압박이 심했던 것 같아. 무슨 압박? 내가 자격 없는 엄마라는 거랑 나 때문에 아이가 잘 못 크고 있다는 불안감? 그럼 좋은 엄마가 되어주고 아이가 성장하길 좀 느긋하게 믿고 기다려주면 되잖아. 나도 그러고 싶은데 잘 안 돼. 그럼 검색을 좀 멈춰 보는 건 어때? 그래야 한다는 걸 아는데, 그게 잘 안 돼. 이미 걱정과 검색에 중독되었는걸. 벗어나고 싶어.


  “이번 정거장은 ‘나’입니다.”

  어서 회복해서 우리 딸 곁으로 가야 하는데, 왜 이 시점에서 ‘나’가 튀어나오지. 솔직히 나와 마주하기 싫어. 난 내가 싫으니까. 억지로 내담자의 자리에 앉아 어렵게 나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다. 평생 스스로가 못마땅하고 눈에 차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상담을 받으며 나는 자신을 보아온 정확히 같은 시선으로 내 아이를 바라보았음을 깨닫는다. 언제나 아이에게서 미흡한 부분을 먼저 찾았고 거기에 대해 걱정했다. 


  어쩌면 그것마저 핑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사실은 결과를 책임지는 게 두려웠던 거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자존감도 낮은 내가 아이를 잘 키울 리 없다고 생각하니 회피해 버린 거다.


  의사 선생님이 부드러운 말투로 말한다.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하는 대신 걱정을 하면 실제로 그 행위를 한 만큼의 에너지가 소모되기 때문에 마치 그 행위를 한 것처럼 착각한다고. 그제야 나는 앞뒤가 안 맞았던 자신의 행동을 이해한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건 ‘걱정’이라는 가짜 육아였던 거다. 그동안 내 모든 에너지와 시간은 아이 대신 걱정을 위해 사용되었다. 


  걱정을 멈추고 이제라도 진짜 육아를 하고 싶어 진다. 하지만 나와 아이는 이미 미소를 잃었고 우리 사이에는 벽이 생겨버렸다. 이미 두 돌도 더 지났는데. 모든 것이 너무 늦어버렸을까 봐 미치도록 두렵다.


  “이번 정거장은 ‘희망’입니다.”

  정말 내게도 아직 희망이란 게 남아있는 걸까. 나는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로 버스에서 내린다. 정거장 벤치에 책 한 권이 놓여있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책을 펼친다. 

  책에는 놀랍게도 자폐증을 안고 성장한 개인과 가족들의 수많은 성공 사례들로 가득하다. 여기서 성공이란 자폐증을 가진 본인도, 그 부모도 모두 행복한 상태를 말한다. 자폐증을 가지고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나는 놀랐고 동시에 실낱같은 희망을 느낀다. 페이지를 넘기는 손놀림이 빨라진다.

  자존감. 그 세 글자는 내 평생 숙제이자 열등감의 원천이었다. 그런데 병약하긴 하지만 정상적인 신체, 안정적 직장, 사랑꾼 남편, 귀여운 아기를 다 가지고도 내가 결코 손에 쥘 수 없었던 그 자존감을 자폐를 가진 친구들이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들의 사례를 살펴보니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그 부모가 자녀를 개선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수용해주었다는 점이다. 아이가 독특한 행동을 해도 부모가 호응하고 격려해주니 아이는 자신이 멋지고 좋은 사람이라 믿으며 자란다는 단순한 원리였다. 자폐증 유무와 별개로 그냥 자존감 높고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는 행복할 수 있다 쳐도 그 부모는? 나는 엄마가 되고 나서 불행하기만 한데, 저들은 자녀가 자폐를 가지고 있는데도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 거지? 그동안 나는 아이를 잘 키워 밥벌이할 능력을 만들어 독립시키는 게 육아의 최종 목표라 생각했다. 그런데 책 속의 부모들은 자녀가 졸업장이나 직장이 없어도 행복하다. 자녀가 행복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제야 부모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건 어떤 외적인 성취가 아닌 자녀의 행복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정신이 번쩍 든다. 세상의 어떤 존재도 행복해질 수 있어. 아직 늦지 않았어. 책을 덮고 아이를 바라본다. 그때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처음으로 아이가 시야에 또렷하게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선명한 눈, 코, 입을 보고 감격한다. 그렇게 나는 진짜 엄마가 된다. 아이가 태어난 지 27개월, 쓰러진 지 10개월 만의 일이다.

  “이번 정거장은 ‘엄마’입니다.”

  다시 들려오는 ‘엄마’ 소리가 반갑고 소중하다. 여전히 두렵지만 아이의 손을 꼭 잡고 버스에서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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