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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니 Aug 26. 2021

나는 완벽주의자가 아니다.
(3호 33개월)

완벽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나다

  나는 완벽주의자다. 매사에 만족을 하지 못하고 완벽을 추구하며 몹시 피곤한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 문득 나의 주치의 김날따 선생님은 지난 1년 6개월의 상담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완벽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게 완벽주의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말도 언급한 적이 없다. 그게 의도적인 것이었을까? 아니면 설마 지금의 내 증상이 완벽주의와는 또 다른 병증이기 때문일까? 상담이 있는 날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선생님, 제가 세상을 흑백논리로 본다고 하셨잖아요. 저에게 조급하다고 상담 1년 6개월째 계속 말씀하시고 계신데요. 그게 제가 완벽주의자이기 때문에 조급하고 흑백논리로 세상을 보는 건가요?”


  온화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던 김날따 선생님의 눈빛이 순간 진지해진다. 보통 내가 중요한 뭔가를 놓쳤을 때 나오는 눈빛이다.  


  “내가 완벽주의자라고 단정 짓는 거, 그건 좋지 못한 생각이에요. 편리한 생각이기도 하죠. 그걸로 내 행동을 합리화할 수 있어요. 보통 책을 어중간하게 많이 읽은 사람들이 이렇게 자꾸 병명을 찾고 이름 붙이는 걸 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요.  ‘저는 물건을 훔쳤어요.’ 이거랑 ‘저는 도둑이에요’ 이거랑 비교하니 어때요?"


  얼핏 듣기에도 두 문장의 미묘한 뉘앙스 차이가 느껴졌다. 그래도 내가 완벽주의자라고 단정 짓지 말라는 건 이해가 잘 안 됐다. 나는 분명 최소 20년 이상 완벽주의자로 살아왔는데. 지인들에게서 완벽주의 소리를 들은 적도 있었다. 최근 읽은 유명 교수가 쓴 책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주의자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그럼 그 사람은 왜 그 말을 썼을까?


  “하지만 완벽주의자에 대한 책들은 너무 많던데요. 완벽주의 말고도 다른 것들도 딱딱 진단 내리는 책들이 엄청 많고요.” 


  “그렇게 단정 짓는 게 훨씬 쉬운 길이거든요. 넌 이거니까 이런 특징을 갖고 있으니 이렇게 해결해. 끝! 또 책이 팔리기 위해서도 그렇게 접근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고요. 너에게 있는 수많은 면 중 완벽주의적인 면도 있는데 그 부분도 보완하고 또 다른 면들도  다 같이 살펴보자. 이렇게 접근하면 굉장히 복잡하고 고차원적인 일이 되니까요. 그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


  이 이야기를 들으니 문득 고등학교 시절 영어 선생님이 말씀해주신 일화가 떠올랐다. 그 선생님은 젊었을 때 위하수(위가 정상 위치보다 밑으로 처져 있는 경우로 신경질적이고 무기력하며 피로를 잘 느끼는 병)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게 자신이 위하수임을 알고 때때로 불편함을 감수하며 살던 중 어느 날 속이 또 불편해 병원을 찾았다. 딴에는 처음 본 의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선생님, 제가 위하수인데요.”라며 말을 시작했는데, 그 나이 든 의사가 갑자기 화를 내더라는 거다. 누가 너더러 위하수라고 했느냐, 왜 위하수니 아픈 건 당연하다 생각하느냐. 좋아질 생각을 해야지 평생 “나는 위하수요.”하고 다닐 거냐고 꾸짖었다 한다. 이 일화는 김날따 선생님의 이야기와 일맥상통했다. ‘나는 위하수요.’와 ‘나는 완벽주의자요.’는 스스로를 한계 짓는 말이었다.  

  그래도 뭔가 병명을 확실히 알아야 고칠 수 있지 않을까. 여전히 석연찮은 뭔가가 있었다. 또 우리가 대화할 때 가끔 “나 감기야. 걔 우울증이래.” 이런 식으로도 말하지 않는가. 그럼 그것도 명사화니까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건지 궁금했다.


  “그럼 언제 그런 진단 내지 단정이 필요한가요? ‘당신은 완벽주의입니다. 나는 우울증입니다.’ 이렇게는 아예 말하면 안 되나요?”  


  “물론 의사들끼리 대화할 때 “그 환자는 00야”라고 말할 수도 있겠죠. 당장 치료해야 하는데 다른 여러 가지 면까지 다 설명하긴 너무 오래 걸리니까요. “


  “대화의 효율성을 위해서는 쓸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그렇죠. 삶에서 물론 그런 명사화된 진단을 쓰는 상황이 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중요한 건 최소한 내가 나 자신에게는 그런 이름을 붙이지 말아야 해요. 나에게는 수많은 복잡한 모습이 있어요. 그걸 나 자신이 알잖아요. 

  

  돌이켜보니 살면서 어떤 잘못된 선택을 하고선 ‘난 완벽주의라 어쩔 수 없어’ 라고 스스로를 합리화시키거나 지레 포기한 적이 많았다. 가능성 차단뿐만 아니라 결점에 대한 합리화까지 해버렸다. 또 완벽주의에 대한 책을 여러 권 읽으면서 완벽주의자들이 가지는 특성을 알게 되었는데, 그 중 나에게 없는 것까지도 당연히 가지고 있을 거라며 나를 그 틀에 거꾸로 끼워 맞추기도 했다. 이쯤 되니 나는 완벽주의가 내 정체성을 맘대로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었던 것 같다. 마치 ‘문제아니까 나쁜 짓을 하지.’ 이렇게 생각해버리듯 말이다. 


  “선생님, 그럼 저는 완벽주의자가 아닌 거네요.” 


  이 말을 하는데 너무 기쁜 나머지 눈물이 다 글썽거렸다. 평생 나를 옭아매던 족쇄가 탁 하고 풀리는 순간이었다. 


  “정말 감사해요. 저는 그냥 완벽주의 성향을 가진 사람일 뿐이에요. 선생님, 저는 완벽주의자가 아니에요.”


  진료실을 나오는 발걸음이 가볍다. 생각해보니 여러 책에서 누누이 언급되는 칭찬하는 법과도 일맥상통했다. “너는 착하구나.” 식의 성격에 대한 규정 말고, “친구를 잘 도와주다니 기특하다.” 이런 식으로 행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칭찬하라고 했다. ‘착하다’처럼 좋은 의미의 규정도 아이에게는 기대치에 부응해야 하는 부담을 주는 독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역시 개인을 무언가로 규정하는 것은 좋지 못한 것 같다.


  완벽주의의 굴레에서 빠져나온 날, 그 개운한 느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껏 들떠서 친정엄마에게 오늘 상담에서 있었던 얘기를 말씀드렸더니 무척 기뻐하셨다. 거기에 마지막으로 엄마가 덧붙인 말씀.


  “그래서 옛날에 효부상 받은 사람들이 평생을 고생했다는 말이 있다. 상을 받으니 보는 눈이 많아져 어쩔 수 없이 열심히 효도했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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