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니 Nov 07. 2021

아이의 놀이

아이의 놀이 방식이 못마땅할 때 (소소 33개월)

  오래전부터 교육현장에서는 자기 주도적 학습이 강조되어 이제는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말이 되었다. 자기 주도성은 공부뿐만 아니라 놀이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놀이를 통해 스스로 선택하고 실행해나가는 힘을 기르는 거다. 


  개구리 잡기 보드게임을 샀다. 게임보드에 열 마리 개구리가 있고 음악이 흐르면 여기저기 개구리에 불빛이 들어온다. 그 불빛 나는 개구리를 뿅망치로 두드리면 점수를 획득하는 게임이다. 규칙성 이해, 소근육 발달, 아이의 즐거움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좋은 아이템이었다. 특히 개구리를 좋아하는 소소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런데 소소는 당최 이 게임의 룰을 전혀 따를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아무리 시범을 보여주고 설명을 해줘도 마찬가지였다. 여기 올챙이가 있네, 이 개구리 등에는 아기 개구리가 타고 있네 등 외형 탐색에 주력하다가 손에 망치를 쥐어주면 불빛과 상관없는 아무 데나 두들기기 일쑤였다. 반면 우리 집에 놀러 온 소소 친구는 보자마자 게임을 바로 클리어했다. 친구가 생일이 3개월 빠르긴 하지만 분명 소소 나이에 비해 무리한 게임은 아닌 것 같았다.


불빛이 들어온 개구리 게임

  오하하 선생님은 놀이의 본래 목적에 맞게 한두 번 소개해주되, 따를 의사가 안 보이면 그냥 아이의 의지대로 놀게 놔둬야 한다고 했다. 알았다 했지만 속이 터졌다. 용도에 맞게 놀면 훨씬 재미있을 텐데! 눈치 빠른 소소가 부담을 느낄까 봐 조심을 하는데도 어느새 “아니야, 여기 불빛 나는 개구리를 치는 거야”라는 잔소리가 늘어갔다. 혹시 인지적으로 문제가 있는 건가 걱정도 됐다. 개구리 게임은 종내 이런 답답한 마음을 해소하기 위해 나 혼자 마구 두들기는 엄마용 게임이 되었다. 


  어쩌다 소소가 게임판 앞에 앉은 모습을 보면 내 안의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직접 손을 잡고 가르쳐주면 알지 않을까 하는 유혹을 꾹 참고 “불빛 나는 개구리를 두드리는 거야”라고 한 번 말했다. 그런데 왠지 한두 번만 설명해주라는 말이 '하루당' 한 번은 아닐 것 같았다. 소소는 이걸 오늘의 신선한 잔소리 1회로 받아들일까, 아니면 예전에 했던 횟수까지 합쳐서 지겨운 잔소리 수 십 회로 받아들일까. 부디 전자이기를. 아무튼 아무렇게나 두드리는 결과는 똑같았다. 보이면 아이에게 자꾸 잔소리만 하게 되니까 나중에는 게임판을 손이 덜 가는 곳에 두었다. 


  이런 와중에 RT 수업에서도 보드게임의 순서가 왔다. 역시나 소소는 게임의 본래 목적에 충실하지 않았지만 오하하 선생님은 미소를 띠고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소소가 어쩌다 한 번 성공하면 크게 축하해 줬다. 그래서 어찌어찌 소소만의 수정된 방법으로 게임을 마무리하고 점수 세기까지 마쳤다. 소소는 집에 와서 “카멜레온 게임 재미있었어.”라고 말하더니 하나 둘 셋 넷 구슬들을 나열하며 선생님이 점수를 세던 모습까지 흉내 냈다. 심지어 다음 수업 시간에 가서는 그 게임을 다시 꺼내달라고 말했다. 


  카멜레온 게임은 분명 개구리 게임보다 더 어려운 수준의 게임이었는데, 다음 시간에도 하겠다고 할 만큼 재미있었나 싶었다. 문득 개구리 게임은 내가 먼저 꺼내지 않으면 아이 혼자는 절대 먼저 시작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개구리 게임에 관심이 적었을 수도 있지만, 나 때문에 개구리 게임을 더욱 싫어하게 되었을 거란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어느 날 지인으로부터 우연히 비슷한 고민을 했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경호도 이 게임을 여섯 살이 되어서야 규칙에 맞게 했어. 그전에는 아무리 설명해줘도 멋대로 해서 같이 하는 형이 막 짜증내고 그랬거든. 망치로 그냥 치면 되는 건데 그 간단한 걸 못하더라고. 그런데 여섯 살이 되고 어느 날 갑자기 "엄마, 나 저 게임 하고 싶어. 꺼내줘"라고 해서 꺼내줬더니 규칙에 맞게 놀더라고. 애들은 자기가 하고 싶어야 하나 봐."


  그 말을 들으니 한시름이 놓였다. 놀이도 아이마다 다 때가 있는 거구나. 나도 여섯 살이건 열 살이건 소소만의 때를 기다려 주리라 마음먹었다. 그렇게 마음의 여유를 찾고 나자 그간 게임의 규칙을 따르라고 말해온 나의 행동이 강요였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내가 아이의 자율성과 자발성을 무시했구나. 소소가 찾은 이 장난감의 매력포인트는 개구리와 올챙이의 모습, 음악소리, 불빛이었고 나는 그걸 존중했어야 했다. 아마 소소는 내게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더 재미있는 게 있는데, 굳이 다른 것도 해야 하나요, 엄마? 더욱이 기껏 뿅망치를 두드리는 별 거 아닌 게임 하나로 아이의 지능까지 의심했다 생각하니 소소의 얼굴을 바라보기가 민망했다.


  남다른 육아법으로 유명한 푸름이 아빠는 아이를 도서관에 데려가서도 한동안은 책을 읽히지 않고 매점에서 간식 사 먹이고 앞에서 배드민턴만 쳤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일단 도서관은 즐거운 곳이라는 인식을 심어준 뒤에야 서가로 데려갔다고 했다. 그에 비하면 나는 ‘도서관에 왔으면 당장 책을 골라 읽어! 책을 좋아해!’라고 강요한 셈. 어서 아이의 능력을 확인하고 싶고, 내가 선택한 아이템이 뽕을 뽑기를 바라는 조급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소소는 무엇이든 조작보다는 대상의 색깔이나 모양, 명칭을 탐색하는 것에 우선적인 흥미를 보여 왔다. 네가 원하는 건 돈도 장난감도 아닌 그저 충분한 탐색의 시간뿐이었는데 그걸 엄마가 주지 못했구나. 앞으로는 놀이할 때 소소의 선택을 존중하리라 다짐해본다. 엉뚱한 방법으로 장난감을 갖고 놀더라도 엉뚱함과 창의성은 짝꿍이라 믿으며. 시나브로 아이의 자기 주도성이 새순처럼 돋아나길 바라며. 


  당장 다음 날 결심을 실천할 시험대가 열렸다. 미리 주문한 인형의 집 세트가 도착한 것이다. 나는 가구를 배치하라거나, 역할극을 하자거나, 옷을 입히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소소가 물건들을 탐색하는 동안 조금씩 말로 거들며 그냥 나도 나름 가구들을 이리저리 놓아봤다. 소소는 한동안 탐색하는 듯하더니 이내 다른 장난감을 찾아 가버렸다. 이때도 “소소야, 이것도 있어”라며 애써 잡지 않았다. 인형의 집은 소소가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방식으로 활용될 것이므로. 


  4개월 후 (소소 37개월) 

  소소가 물끄러미 개구리 게임판을 들여다보더니 전원을 켰다. 그리고는 뿅망치로 불빛 나는 개구리들만 두드렸다. 그렇게 한 판을 클리어하더니 무심한 듯 다른 데로 가버렸다.  



작가의 이전글 육아 천재의 비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