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발전을 아는 지표 (소소 32개월)
RT 16회째 수업 날이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소소는 많은 부분에서 발전을 보이고 있다. 말수가 꾸준히 늘고 있고 무엇보다 표정이 밝아졌다. 아직 낯가림은 심하지만 타인에 대한 관심도 많아졌다. 오늘은 그동안 낯을 가리느라 수업시간에 한 번도 말을 하지 않던 소소가 몇 마디 말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보니 굉장히 고무가 되었다. 이제 이 속도라면 곧 모든 걸 제자리로 되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변수는 아이의 입과 마음의 문을 닫게 했던 심리·정서적 부분이다. 얼마 전 실시했던 언어평가에서 생각보다 점수가 저조했다. 표현 언어(아이가 말로 표현하는 언어)와 수용 언어(아이가 듣고 이해하는 언어) 간 점수차가 컸기 때문이다. 평가를 할 때 소소는 아는 것도 입만 달싹할 뿐 말로 표현하지 못했다. 오하하 선생님은 이 간극이 심리적인 원인으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서적인 부분이 채워져야 한다는 말이었다.
오늘 센터 수업에서 아이의 발전된 모습을 보니 문득 궁금해졌다. RT 수업은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걸까. 그 정서가 채워졌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는 걸까. 낯가림이 줄어든다거나 친구들과 놀이를 같이 한다든가 센터 선생님에게 말을 잘하게 된다거나 하는 이런 객관적 징후가 있는 걸까.
“소소의 정서가 올라와야 한다고 했는데,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어떤 지표나 이런 게 있을까요?”
오하하 선생님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일단 엄마가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을 좀 편하게 느끼고..”라며 말을 시작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 선생님, 저 알겠어요!”라고 외쳤다. 선생님의 저 짧은 말마디에 모든 것이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소소의 심리는 엄마의 심리가 안정되면 해결되는 거구나. 끌어올려야 하는 것은 아이 마음이 아니라 내 마음이었어.’
사실 요즘 육아에 대한 시험을 치르는 기분으로 매일을 살고 있었다. 오늘은 선방했다, 오늘은 30점이다, 오늘은 빵점이다 이렇게 매일 밤 평가했다. 점수가 만족스러운 날은 기분이 좋고 점수가 낮은 날은 우울과 자책이 이어졌다. 이런 나의 불안정한 감정이 아이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을 것이다.
하여 우선 엄마인 내가 아이와 있는 시간을 편안하게 느껴야 한다는 말에 무척이나 공감이 갔다. 몸이 힘들거나 우울해질지언정, 엄마-아이라는 존재 자체, 관계 자체에 대한 압박감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 나의 내면이 때로는 힘든 날도, 때로는 좋은 날도 있는 보통의 엄마의 마음이 되면 소소도 자연스레 다 좋아질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RT 수업은 부모가 아이와 상호작용하는 법을 배우는 수업이다. 처음에는 상호작용하는 태도와 기술을 배우는 데에 집중했다. 선생님의 예시를 보고 내가 따라 하고 피드백을 받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40분의 수업 중 절반 정도는 나의 하소연 시간이 되었다. 선생님이 수업을 시작할 때 “이번 주는 어땠어요?”라고 질문하면 있었던 일들, 그 속에 담긴 나의 고민, 그리고 내가 깨달은 것들 등을 털어놓느라 마치 나의 넋두리가 주가 되는 수업 같았다. 속으로 이래도 되나 싶기도 했다. 좀 더 아이와 상호작용을 더 잘하기 위한 ‘기술적인’ 것들을 배워야 할 것 같은데 아이 머릿속보다는 내 머릿속에서 일어난 일들에 집중하고 있으니. 하지만 한 주간의 일을 이야기하면서 오하하 선생님이 조언해주는 부분이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그냥 진행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늘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들에 대해 많은 것을 짚어주었다.
그동안은 나의 긴 수다에 선생님이 마지못해 응해주고 있는 거라고 혼자 생각했다. 아이와 놀아주는 방법을 알려줘야 하긴 하지만 내가 워낙 우울해하고 힘들어하니 그걸 받아주고 있는 거라고. 아이 키우는 엄마들의 애로를 알기에 위로해주는 거라고.
그런데 오늘 엄마의 마음상태가 좋아지면 아이는 자동적으로 좋아지겠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그동안의 하소연 시간 또한 RT 수업의 한 형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과의 대화를 통해 엄마의 마음가짐을 다잡고, 잘못 생각한 부분은 고치고, 나 자신이나 아이에 대한 오해를 줄여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부모의 마음밭을 단단히 다지고, 그것을 통해 분명히 아이와의 상호작용에 긍정적인 영향이 갔을 것이다. 다른 RT 수업도 이런 식으로 진행되냐고 물었더니 다 다르다고 한다. 소소네는 엄마와의 대화 시간이 긴 편이고, 어떤 집은 수업 시연부터 바로 들어가고, 또 어떤 집은 잠깐 대화하고 상호작용 수업에 더 집중한다고 했다. 역시 선생님이 다 생각이 있어서 이루어지는 작업이었다.
더 큰 희망을 갖게 되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은 내게 공포였다. 하지만 이젠 공포가 아닌 시험이다. 하루하루 육아를 시험치듯 사는 삶이 괴롭고 부끄러웠는데 생각해보니 공포에 비하면 큰 발전이다. 공포는 매일이 0점이지만 시험은 20점도 있고 50점도 있고 드물지만 80점인 날도 있으니까. 엄마의 상태에 따라 우리 소소도 좋아지는 거라면, 나는 분명히 나아지고 있다. 소소의 정서도 계속 채워질 것이다.
언젠가 점수 매기기를 그만두고 자연스럽게 아이와 마주하는 꿈결 같은 순간이 오길. 그날을 위해 오늘도 포기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