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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니 Nov 09. 2021

눈물의 크리스마스

육하원칙 vs 육아원칙 (소소 32개월)

  야심 차게 준비한 크리스마스 아침이 밝았다. 소소를 위한 선물의 개수는 무려 12개! 미국 아이들처럼 포장을 하나하나 뜯는 재미를 주고 싶어 준비한 나의 야심작이다. 트리 밑에 옹기종기 놓인 선물의 모습은 마치 동화 속 한 장면 같았다. 기뻐하는 아이의 모습을 상상하며 나의 가슴은 흥분으로 터질 것만 같았다. 


  잠시 후 잠에서 깬 소소는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코가 꽉 막혔고 숨소리도 거칠었다. 새벽에도 코가 막혀 힘든지 자다가 깨서 한참 울다가 겨우 잠들었다. 그렇지만 선물들을 보는 순간 기분이 확 좋아질 걸! “산타할아버지가 트리 밑에 선물 두고 가셨대!” 호들갑을 떨며 아이를 거실로 몰고 나왔다.


  선물을 본 소소는 감흥 없는 말투로 “놔뒀네?” 하더니 상자를 하나 집어 들고 잠시 보다가 책장에서 책을 빼서 읽기 시작했다. 나는 소소의 첫 크리스마스 추억을 남기고자 동영상 촬영 중이었다. 예상대로라면 환희의 비명을 지르며 달려가 포장지를 정신없이 잡아 뜯어야 했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난 소소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그 사이 육아 단톡방에서는 다른 아이들이 선물 받고 신이 난 소식들이 전해졌다.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12개의 선물

  아침밥을 먹고 잠에서 완전히 깬 후에도 소소는 선물에 도통 관심이 없었다. 유도를 해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스스로를 진정시키려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아이라면 당연히 선물에 환장해야 하는 거 아닐까? 아닐 수도 있지. 환장하지 않는 아이도 있을 수 있어. 원래 차분한 성격이라 그런 건 아닐까. 아님 마음을 연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도 심리 문제가 있는 걸까. 코가 막혀 잠을 잘 못 자서 컨디션도 별로일 거야. 그런데 저게 정상적인 행동일까.


  소소가 조카 하나가 보고 싶다고 해서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소소가 선물에 관심을 보이지 않아”라고 말하는데 눈물이 주르륵 흐르고 말았다. 내가 울먹이자 언니는 나의 걱정을 단박에 눈치챘다. 


  “네가 지금 상상하는 90%는 분명 틀린 생각일 거야. 그냥 아직 모를 수도 있어. 그리고 외동이니까 경쟁자도 없잖아. 네가 소소한테 보여줘. 아이 옆에서 엄마, 아빠가 엄청 신나게 선물을 뜯는 거야!” 


  그러네. 까짓것 모르면 가르쳐주자. 선물을 받는 건 좋은 일이라는 것. 저 포장지 안에 나를 기쁘게 할 멋진 것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엄마잖아. 가르쳐주면 돼. 불안의 눈길은 접어두고 정신 차리자. 


  남편과 나는 아주 큰 소리로 말했다. “선물을 뜯어봐야지. 어떤 걸 뜯을까? 안에 뭐가 있을까?” 호들갑을 듣고 소소가 방에서 나왔다. 어떤 선물을 뜯을지 고르게 한 다음 셋이 같이 포장을 뜯었다. 소소가 좋아하는 팝콘이었다. 팝콘이 튀겨지는 동안 소소는 신이 나서 전자레인지 주변을 맴돌았고 엄청나게 많이 먹었다. 나는 또 선물을 골라보라고 제안했다. 이번엔 장갑이 나왔다. 소소는 장갑이 마음에 드는지 계속 끼고 돌아다녔다. 


  정오가 지나자 소소가 이유 없이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오늘 컨디션이 나쁘긴 하구나. 주의 환기를 위해 얼른 다음 선물을 꺼냈는데 소소가 좋아하는 장난감 바이올린이었다. 소소는 금세 웃음을 찾고 연주하는 시늉을 하며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우리는 오늘따라 보채는 소소와 선물을 뜯고 갖고 놀며 하루를 다 보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오후 5시, 소소와 아빠는 함께 코를 골며 낮잠을 자고 있고 내 뒤에는 아직도 뜯지 않은 네 개의 선물이 놓여 있다. 


  이젠 불안하지 않다. 소소가 선물 하나하나를 무척 좋아했기 때문이다. 같이 선물을 차례로 하나씩 풀며 노는 것도 굉장히 좋은 일이었다. 다만 소소는 굳이 서둘러 포장을 뜯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확실히 오늘 아이 컨디션이 나빴다. 안 하던 떼를 쓰고, 낮잠을 안자는 편인데 스스로 잠든 걸로 봐서 밤새 코가 막혀 잠을 못 잔 듯했다. 


  아마 그동안 감정 표현에 소극적이었던 부모의 영향도 분명 있을 거다. 오늘 일로 우리 부부는 그동안 못했던 것만큼 더욱 적극적으로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숙제가 있음을 자각하고 일상에서 더 크게 기쁨과 감사를 표현하기로 다짐했다. 선물 포장지를 뜯는 기쁨은 소소가 천천히 알아 가리라 믿는다. 아이가 모르면 부모가 가르쳐주면 된다. 그게 부모의 일이다. 그저 내가 열심히 본보기가 되어주면서. 언젠가는 아이가 그걸 자기만의 방식으로 소화해낼 것이라 믿고.


  아아, 야심 차게 준비한 첫 성탄절의 기억은 오늘도 이렇게 반성과 자책으로 물든다. 하지만 신에게는 아직 뜯지 않은 4개의 선물상자가 남아 있습니다. 우리의 크리스마스 저녁은 남은 선물 뜯기로 마무리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절대 재촉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 쓰고 글을 마무리했는데 친정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 있었던 일을 말했더니 대뜸 어른도 감기 걸리면 만사가 귀찮다고 하시며 소소의 오늘 반응을 당연시하셨다. 내가 생각보다 더 바보짓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직 안 뜯은 선물이 남아있다고 말했더니 그럼 그건 그냥 다음에 주면 되겠다고 하셨다. 그러고보니 오늘 안에 다 뜯어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그런데 나는 왜 오늘 다 뜯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를 생각하다가 문제점을 깨달았다.  


누가 : 아이가 직접

언제 : 오늘 아침에 눈뜨자마자

어디서 : 트리 밑에서

무엇을 : 선물 12개를

어떻게 : 신나게 흥분해서 풀어헤친다

왜 : 엄마가 열심히 준비했으니까 and 정상적인 애들은 다 선물을 향해 미친 듯이 돌진할 거라는 나만의 생각


  나는 오늘의 크리스마스 이벤트가 저 육하원칙 중 어느 항목도 벗어나지 않기를 기대했다. 머릿속에서 그 육하원칙을 지키려 애쓰느라 정작 중요한 육아원칙은 전혀 지키지 못했다. 아이에 대한 믿음, 미소, 기다림. 반성의 글을 마무리를 하자마자 아직도 또 반성할 일이 남아있었다. 반드시 00해야 한다는 완벽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 그래도 알아서 다행이다! 



  

  지금 시각 저녁 7시 다시 반전이 있었다.(물론 반성거리도 동반했다) 3시간 동안 낮잠을 푹 자고 일어난 소소가 벌떡 일어나서 남은 4개의 선물을 한방에 모두 뜯어버린 것이다! “이것도 열자!” 하는 목소리는 들떠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어안이 벙벙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종일 전전긍긍하며 울던 내 모습이 무성영화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너 낮에 아팠구나. 분명 새벽에도 울고 숨소리도 안 좋고 밥도 잘 안 먹었는데. 아픈 줄도 모르고 엄마가 우리 애 머리가 잘못된 거 아니냐며 혼자 난리굿을 쳤구나.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던 찰리 채플린의 말이 우리 집에서 실현되었다. 



  

  이틀 후. 언니가 크리스마스 사건을 겪으며 내가 성장한 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신니야, 약간 너 스스로 해결하는 힘이 생긴 것 같아.” 


  “아니야. 크리스마스 선물 사건 때 첨에 좌절하고 울다가, 나중에 좋아졌지. 근데 그건 내가 스스로 깨달은 게 아니잖아. 너무 힘들어서 언니에게 전화했다가 언니가 나더러 선물을 즐겁게 뜯는 본보기를 보여주라고 조언을 해줘서 좋아진 거잖아.”


  “그날 우리 집이 크리스마스 파티 중이라서 통화를 5분도 못하고 끊었잖아. 그런데 내가 너한테 그 짧은 시간에 한 마디 한 거 가지고 네가 바로 울음을 그치고 긍정적인 마인드로 바꿨어. 사실 내가 하는 충고는 늘 비슷했을 텐데 예전에는 네가 그걸 몰랐던 거야. 그런데 이젠 네가 그런 조언을 받아들일 힘이 생겼다는 거 아닐까? 너와 대화할 때 좀 느낌이 예전이랑 달라졌어.”


  다행이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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