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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니 Nov 15. 2021

감정은 판단의 대상이 아니다

새끼는 원래 그리 키우는 거야 (소소 32개월)

  오늘 RT 17회 차 수업에서 소소가 꽤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말도 하고 처음으로 선생님 말에 “네”라고 대답까지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곰이 첼로를 연주해. 여우는 바이올린. 숲 속의 음악회 책에서. 아빠가 컴퓨터로 음악 틀어주셨어.”라며 자기가 본 책 이야기를 제법 전달했다. 집에 와선 밥도 잘 먹고 소아과에 가서 감기 진료를 보는 동안 울지도 않았다.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누웠는데 오늘 여러모로 성장한 듯한 소소의 모습에 뿌듯함이 피어올랐다. 그러다 기쁨도 잠시, ‘내가 기뻐할 자격이 있는가’라는 묵직한 질문이 찾아왔다.


  나의 잘못으로 힘들어진 아이가 지금 잘 회복되고 있다고 자축한다면, 병 주고 약 준 사람의 몰염치한 행동이 아닐까. 아이에게 병을 줘놓고 내가 약을 잘 줘서 애가 좋아졌네, 내가 잘하고 있네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앞뒤가 맞는 걸까. 반대쪽 생각도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기뻐해도 돼.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라도 반성하고 앞으로 나아가려면 칭찬과 긍정적인 경험이 반드시 필요해. 소소를 위해서라도 엄마의 자축과 자신감은 꼭 필요해. 하지만 이미 마음속으로는 ‘자격이 없다’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갈팡질팡하며 계속 질문을 던지다가 잠이 들었다. 


  마침 다음날이 김날따 선생님과의 상담일이었다. 어젯밤의 고민에 대해 이야기했다.


  “감정을 평가하는 건 위험한 생각이에요. 감정은 있는 그대로 느끼면 돼요. 어제 소소가 센터에서 잘했을 때 뿌듯했다 그랬죠? 그럼 아, 정말 뿌듯하다, 끝. 물론 그 뿌듯하다 뒤에 ‘그러니 앞으로 더 00 하게 해야겠다.’ 이 정도의 생각은 덧붙일 수 있겠죠. 하지만 이건 생각이에요. 감정과 생각은 다른 거거든요.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사람들이 가진 취향을 함부로 비판하면 안 돼요. 취향은 누군가의 감정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취향을 비판받으면 화가 나요.”


  마음껏 기뻐해도 된다는 말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사실 그 말이 너무나 간절하게 듣고 싶었다. 소소 엄마, 마음껏 기뻐해도 돼.


  감정은 평가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 이해가 간다. 나도 모르게 마음에 불쑥 떠올라버린 것을, ‘이렇게 느끼면 안 돼’ 이렇게 뒤늦게 평가를 해버리면 곤란할 것 같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발생하는 거니까. 그냥 느껴지면 느껴지는 대로 물 흐르듯 인정하는 게 순리인 듯하다.


  사실 그동안 부정적인 감정들을 수용하는 데에는 나름 애써왔다. 심리학 책을 열심히 읽은 덕에 화가 나면 ‘아, 화가 나는구나’, 질투가 나면 ‘아, 질투가 나는구나.’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잘 되진 않았지만. 그런데 이제 기쁨, 행복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도 그대로 인정해줘야 할 대상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긍정적인 감정에조차 심리적 저항을 느낄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취향이 감정이라는 말도 되새겨보았다. 만약 녹색 치마를 입고 출근했는데, “너한테 녹색 치마는 안 어울린다.” 이런 얘기를 아침부터 듣는다면. 상상만 해도 불쾌하다. 이렇게 생각하니 감정 수용의 중요성이 더욱 와닿았다.


  아이를 아프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언제나 죄인의 마음으로 위축되어 살아왔는데 앞으로는 좋은 일이 있으면 맘껏 기분을 누려야겠다. 이로서 조금 더 밝은 엄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원래 새끼는 그리 키우는 거야 (소소 33개월)


  맘카페에서 심란한 글을 보고 말았다. 「아이가 또래에 비해 언어가 느리지만 계속 좋아지고 있어서 기다려주고 있었는데, 지인의 염려를 듣고 갑자기 걱정된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는 게 나을까?」 하고 묻는 내용이었다. 그걸 본 내 마음도 갑자기 불안해졌다. 소소는 너무나 잘하고 있고 나도 편안하게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기로 했는데, 이 불안함은 뭐지. 새해부턴 이런 거 안 하기로 했는데. 이러면 안 돼. 다스리려 애썼지만 흐트러진 마음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위대한 에디슨 엄마는 아이를 무조건 믿어줬다는데, 나는 왜 그게 안 될까. 마침 친정엄마가 와계셨다. 육아의 달인 친정엄마라면 에디슨 엄마처럼 행동할지 궁금해졌다.


  “엄마, 엄마가 소소를 발견했는데 소소가 닭장 속에 있는 거야. 근데 가슴에 계란을 딱 품고 있는 거야. 그럼 엄마는 어떻게 하실 것 같아요? 

  “바로 꼬셔서 끌어내야지.”

  “왜?”

  “아유, 똥이고 털이고 더러우니까.”

  “그런데 에디슨 엄마는 그걸 보고 왜 그러고 있냐고 질문하고, 애한테 설명도 해줬대요.”

  “하하, 그렇구나. 그러니까 역시 위대한 에디슨 엄마군. 그런데 야, 그거 에디슨이 미국 살아서 그런 걸 수도 있어. 엄마가 미국 살 때 보니까 미국 사람들은 신발 신고 집안에 막 다니더라. 개도 엄청 많이 키워서 잔디밭에도 개가 엄청 돌아다니거든. 그럼 거기에 오줌도 쌌을 거 아냐. 그런데도 사람들이 그냥 거기에 다 막 앉아. 갓난아기들도 그 잔디밭에 그냥 막 기어 다녀. 그래서 우리나라 같으면 닭장이 더럽다고 하는 거 걔네들은 안 더럽다고 느낄 수도 있을 걸?”


  엄마 얘기를 들으니 우습기도 하고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래도 에디슨 엄마는 아이가 학교에서 쫓겨나도 믿어줬잖아요. 엄마, 제가 방금 아이 발달 관련 글을 봤는데, 마음이 불편해요. 에디슨 엄마처럼 아이를 믿어주고 하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은데 그게 잘 안돼요.”


  “소소가 전에 많이 안 좋았던 시기가 있었으니까 우리가 예민해져 있는 거잖아. 그런데 있잖아, 애가 특별히 아프지 않고 그냥 정상아인 부모들도 다 불안해해. 멀쩡하게 애가 잘 크고 있는데도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집 누가 뭐 잘하는 거 보면 갑자기 걱정이 생겨. 그건 당연한 거야. 부모니까. 일단 자식이 생긴 이상 세상 어떤 부모도 걱정에서 자유롭지 못해. 그러니까 우리 마음껏 불안해하면서 살자. 원래 새끼는 그리 키우는 거야.


  김날따 선생님으로부터 “마음껏 기뻐해도 됩니다”라고 들었을 때처럼 시원하면서도 따스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잔뜩 굳어있던 마음이 눈처럼 녹아내렸다. 나 이제 마음껏 불안해도 되는구나. 자식은 원래 이렇게 키우는 거구나. 


  지난 상담에서 감정을 그대로 수용해주라고 했는데 어느새 ‘불안해하면 안 돼’하고 평가하고 있었다. 며칠 전 방송에서 오은영 박사가 한 아이 엄마에게 불안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고 충고하는 걸 보았다. 김날따 선생님도, 친정엄마도, 오은영 박사도 비슷한 시기에 똑같은 조언을 3단 콤보로 하다니, 이제 정말 봉인 해제할 때가 되었나 보다. 이것이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그동안 계속 누군가가 말하고 있었는데 이제야 내 귀에 들리는 건지 모르겠다.


  ‘신니야, 불안해? 00 해서 힘들구나. 괜찮아. 불안할 수도 있어. 괜찮아.’ 요즘은 마음이 많이 부대낄 때면 종종 이렇게 말한다. 엄마니까 무조건 믿어줘야 해, 불안해하면 안 돼, 할 수 있어 라고 무조건 다그치는 대신, 불안한 감정을 충분히 수용하고 정성껏 다독이려 노력한다. 그럼 신기하게도 내 안의 부정적인 감정이 어느 순간 떠날 채비를 한다. 때로는 어떤 판단이나 충고보다 그저 다정한 눈길로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 말없이 손을 잡아주는 것이 사랑임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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