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네 집에 놀러 갔는데 소소가 낯선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위축되지 않고 기대 이상으로 잘 놀아주었다. 장난감도 자유롭게 탐색하고 친구에게 물건을 빌려달라고 묻는 등 편안한 모습을 보였다. 이 기쁜 소식을 회사에 있는 남편에게 얼른 전하고 싶어 전화를 하려는 순간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이걸 듣고 남편이 소소에 대한 걱정을 멈추면 어쩌지? 안심해버리면 어쩌지? ’
진심이었다. 차라리 소소가 멋지게 해낸 이야기를 하지 말아버릴까도 싶었다. 그냥 친구네서 놀다 왔다고 담백하게 말해도 남편 성격상 조목조목 물어보진 않을 테니. 하지만 스스로 납득이 되지 않았다. 도대체 남편이 안심하는 게 왜 두려울까. 문득 전에도 동일한 상황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도 같은 이유로 남편에게 소소의 긍정적 변화를 전할까 말까 고민했다.
내적 갈등은 겪었지만 결국 이번에도 사실대로 전달했다. 정직이 미덕이어서도, 남편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오직 소소를 격려하기 위해서 내키지 않는 입을 열었다. 친구 집에서 얼마나 잘했는지 하나하나 강조해서 전달했고 아빠는 소소를 크게 칭찬했다.
소소가 잠든 시간, 두 번씩이나 찾아온 이상한 마음을 이해할 길이 없어 남편에게 꾸역꾸역 털어놓던 중 한 가지 사실을 알았다. 내가 ‘불안하지 않은 상태를 불안하게 느낀다’는 것. 마치 불안 자체가 나의 정체성이 되어서, 그렇지 않은 상태가 되면 위협받는 것처럼 느꼈다. 그걸 알고 나니 더 혼란스러워졌다. 불안이 내 정체성이라니, 이런 거지 같은 경우가 있나. 적과 나를 동일시하는 이 원치 않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결국 해답을 찾지 못한 채로 대화를 마무리하며 남편에게 뜬금포 질문을 던졌다.
“요즘 행복해?”
“행복한 것 같은데……?”
남편은 갑작스러운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려 애쓰는 듯 신중하게 대답했다.
“그래? 행복해?”
“응, 행복해.”
“그렇구나. 그럼 오빤 지금 소소가 잘 자라고 있다고 생각해?”
“응, 잘 자라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구나. 그럼 오빠는 지금 우리 가족이 행복하다는 거지?”
“응.”
일전에도 이와 비슷한 대화가 몇 차례 있었다. 아마 대부분 소소가 태어난 이후였던 것 같다. 내가 왜 이런 뜬금없는 질문들을 반복하고 있는 거지? 마음에 돋보기를 갖다 대고 찬찬히 살펴 이유를 알아냈다. 나는 내 입으로 인정할 용기가 없었던 거다. 행복함을 인정하고 아이가 잘 크고 있다고 인정하면 내가 태만해져서 엄마로서 해야 할 일을 놓쳐서 아이가 잘못될까 봐. 그래서 나의 불안은 그대로 두고, 남편의 입을 빌려서 소소가 잘 크고 있다고, 우리 가족은 행복하다고 확인받고 싶었던 거다. 나는 불안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
정신과 상담일에 김날따 선생님에게 우울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늘 제 안에 내재된 불안이 요새 가끔 사라지는 타이밍이 있거든요. 그럴 때면 마음이 더 불편해져요. 마치 불안이 제 정체성 같고, 정체성이 흔들리는 걸 제가 거부하는 것 같아요.”
“엄청난 깨달음입니다. 축하해요.”
“네?”
“쳇바퀴를 뛰고 있는 다람쥐는 인생에서 멈춰본 적이 없어요. 그러다 쳇바퀴가 고장 나서 어느 날 뛰지 않게 되었을 때 이런 느낌도 있구나 를 알게 되죠. 신니씨는 이 뛰기와 멈추기 이 두 가지를 다 경험해 본 거죠. 신니씨는 이제 불안하지 않은 순간을 경험해봤어요. 중간중간 불안하지 않은 순간을 느껴야 ‘아, 내가 불안하구나’를 느껴요.”
쳇바퀴가 멈춘 갑작스러운 휴식 시간에 어리둥절해하는 다람쥐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아, 나는 불안하지 않은 상태가 익숙하지 않구나. 온몸의 세포를 바짝 긴장시키고 살아왔으므로 편안한 감정이 찾아오자 오히려 낯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저는 왜 남편에게 축소해서 말하려고 했을까요? 소소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 제가 용기를 낸 거지, 그렇지 않았으면 진실을 말했을까 싶어요.”
“아이를 위해 말하기 싫은 마음에 맞서 용기를 냈다는 건 더 대단한 일이죠. 공부도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다 보면 성적이 오르고 그러다 보면 나중에는 공부가 하고 싶어지잖아요.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는 건 꼭 필요한 중간 과정이에요.”
우주에는 관성의 법칙이 존재한다. 불안과 우울이 나를 떠나지 않아 고통스럽다고 생각했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내가 그것들을 놓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내 안에 머문 부정적인 감정은 나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그렇기에 잠시 평안한 상태가 되자 정체성이 흔들려 불편해졌다. 익숙함에서 벗어나는 것도 두렵고, 부정적인 감정을 대체할 긍정적인 감정도 아직 낯설기 때문이다. 더구나 내재된 불안이 큰 상태에서 변화를 위한 불안까지 겹친 이중고에 맞서야 하니 더 버거웠을 거다. 1+1의 과정을 겪어내고 나면 2배의 불안이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새로운 긍정적인 감정이 채울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으니까.
정체성으로서의 불안 + 변화를 위한 불안 = 2배의 불안 (×)
정체성으로서의 불안 + 변화를 위한 불안 = 새로운 긍정적인 감정 (○)
실체가 없는 미래가 두려워 언제나 걱정하고 최대한 대비하며 살아왔다. 때로는 이 마음이 나와 아이를 위험으로부터 지켜주기도 하고 좋은 성과로 이끌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1년 중 365일을 긴장하며 살고 싶지 않다. 내게는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보며 웃고 행복해할 시간과 여유가 필요하다. 쫓기는 듯 살아온 지친 자신을 돌보고도 싶다. 기쁠 때 기쁘다고 말하고 싶고,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을 땐 그냥 생각을 내려놓고 쉬고 싶다. 옆에서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마법 같은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오랫동안 나를 지켜준 불안과 우울아, 그동안 수고 많았어. 나는 믿음, 평안과 같은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고 싶어. 내 안의 너희들의 실체를 알았으니 나는 이별하는 연습을 시작할 거야. 너희를 꽉 잡고 있던 손의 힘을 조금씩 풀 거야. 관성의 힘이 사라질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