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제가 중학교 때 이야기 들려 드릴까요?”
인터뷰가 끝나갈 때쯤 준서(가명)는 아파트에서 십여 년 전 투신자살한 친구 A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트랜스젠더’라는 말조차 생소했던 그때, A는 반 친구들로부터 아웃팅을 ‘당했다’. 왕따와 괴롭힘이 시작되었다.
견디지 못한 A는 숨 쉴 곳을 찾아 인근 여자 중학교로 전학을 갔다. 전학을 가서도 여전히 그는 왕따였다. 그런 A가 유일하게 있을 곳은 위클래스였다. 세상의 냉대에 파르르 떨어야 했던 A는 이곳에 와서야 작은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곳에 와야만 살 수 있었다. 유일한 친구인 준서와 상담 선생님과만 조금이나마 이야기를 했다. 상담실을 한 발자국이라도 벗어나는 것이, A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렇게 상담실에서 힘겹게 몇 번 숨을 쉬다가, 몇 마디를 하다가, 유서를 쓰고 아파트에 올라가 투신자살을 했다. 혐오와 폭력이 A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유서에는 유일한 친구였던 준서(가명)에게 전하는 말만 적혀 있었다. ‘너는 살아달라고. 죽어도 남자로 죽어달라고’ 부모에게, 반 아이들에게, 선생님께 전하는 말은 없었다. 준서 말고는, 그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었던 것이다. A는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준서는 A의 장례식장에 갔는데. 그곳에는 상담교사와 부모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A의 부모는 아들이 왜 죽었는지 알지 못해 괴로워했고, 준서는 A의 아픈 삶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부모는 이야기해줘서 고맙다고 했지만, A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준서는 웹툰과 유튜브를 통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지만,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한국 사회의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은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세상이 바뀌는 데 어떤 기여를 했는지 자책도 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세상은 안 바뀔 것 같은데 왜 인터뷰 요청에 응했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자신은 자살시도로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등 삶이 너무나 고통스러웠음에도 불구하고, 그 친구의 유서 때문에 살고 있고, 그 친구에 대한 의무감이 있기 때문에 세상이 바뀌는 데 조금은 기여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절망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을 조금씩 변화시켜 나간다.
나는 조용한 죽음이 슬프다고 말했다. 목이 메인 채로 “제가 더 열심히 할게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나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의미 있는 일을 한 것 같다고, 그래서 다행이라고 작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트랜스젠더 의료. 이번 취재가 실패할지도 모르겠다. 매일 타지를 오가며 수많은 트랜스젠더를 만나 이야기를 듣고 하루에 열몇 시간씩 붙잡고 있음에도 자신이 없다. 하지만 세상에 울림을 주는 좋은 기사를 쓰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해보려고 한다.
나는 평소에 습관처럼 감정이 없다고 말을 한다. 실제로 그랬다. 고등학교 때 빌라 옥상에서 뛰어내린 사람을 보고도 감흥이 없었고, 세월호 때문에 온 세상이 슬픔에 잠겨 있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늘 MBTI 핑계를 댔지만, 관심이 없고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오늘 내 목소리가 떨리고 목이 메었던 건, 트랜스젠더 열몇 명을 만나고 관련 공부를 하면서 그들이 겪는 일을 내 문제처럼 바라볼 수 있게 돼서 그런 건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