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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의 편지

26. 발신인

by juyeong

-모시모시 남방

-… 고운 언니.


편지 없이 건 몇 번의 전화. 통화를 이어가려 애쓰는 고운의 진심이 닿은 것인지. 쭈뼛거리던 숙희는 차츰 말이 길어졌다. 오라버니는 키가 커요. 오라버니는 공부를 잘해요. 물론, 팔 할은 경수 이야기였다. 덕분에 고운은 정말 경수의 동무가 된 것 같았고, 놀랍게도


-곧 있으면 오라버니 생일이에요.

-아쉽네.


이 또한 진심이었다.

숙희 생일이라면, 경수가 동경에서 선물을 보내왔다는 핑계로 잠시 만날 수 있을 터였다. 그때 잃어버린 편지를 받아내면 작전 끝인데. 경수 생일을 빌미로 만나기는 좀 애매하지. 다음 주는 또 뭐라고 떠드냐.

억.

고민에 빠진 고운을 깨우는 건 늘 그렇듯 민우였다. 낡은 고무신이 미끄러져 발라당 넘어졌다. 누나 나 괜찮아. 봐봐. 옷이 하나도 안 더러워졌잖아. 허둥지둥 일어난 민우는 외투부터 살폈다. 그거 좀 더러워지면 어떻다고, 손에 생채기 난 줄도 모르고. 고운은 착잡했다.

처음부터 그랬다.


-아이고. 딱 맞네.


민형 이름으로 온 우편물을 살피는 두 모자의 손길이 얼마나 조심스러웠는지. 말도 못 한다. 겨우내 입을 옷에서 먹거리, 부족했던 생활비와 월사금까지


-형은 어떻게 다 아는 것처럼 보냈지?

-아휴. 민형이는 밥 잘 먹고 지내려나.


며칠째 끙끙거리던 문제가 해결된 모자는 기뻐했다. 뛸 듯이 기뻐한 정도가 아니고, 정말 두 발을 콩콩 뛰면서. 그때마다 고운의 마음이 콕콕 쑤셨다. 민형이 아니라 내가 보낸 걸 저들이 알게 된다면.

고운은 종종 이곳에서의 삶이 만주에서 지낸 날들보다 무거웠다.


종일, 갑갑한 상품권 상자에 있다 나온 고운은, 국숫집으로 가는 대신 백화점을 몇 바퀴 돌았다. 구두란 구두는 다 살피고 나서야 마침내 후보를 두 개로 추렸다. 하나는 민우가 좋아할 것 같은 구두, 다른 하나는 민형이 샀을 것 같은 구두.


-이걸로 주세요.


민형의 안목을 따르기로 하고 물건을 가져오겠단 점원을 기다리는데, 지나가는 남자가 지갑을 떨어뜨렸다. 저기요. 고운의 부름에 멈춰 선 남자는 다소 공허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이거 떨어뜨리셨어요. 묵묵부답. 왜 대답이 없지? 아 일본인인가?


-고객님. 찾으시는 물건이 지금 없는데, 마침 내일 들어오거든요. 그때 받아도 괜찮으세요? 성함 남겨주시면 준비해 드릴게요.

-고운이요. 김고운.

-네.

-감사

-감사합니다.


고운의 목소리 위로 다른 인사가 겹쳤다. 점원과 이야기하는 사이 다가온 그 남자였다. 아, 지갑. 남자는 고운이 내미는 지갑을 받아 들며 고운의 얼굴을 바로 보았다. 낮은 목소리에 묘한 생기가 돌았다.

지갑에 박힌 그의 이름은, 태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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