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아수라
그해 겨울, 경성은 사방이 붉은 동그라미였다.
흰 천에 태양을 그린 일장기라지만,
조선인들 눈에는 그 붉은 원들이 피처럼 보였다.
사방에 피비린내가 퍼졌다.
탕.
총성에 뒤를 돈 숙희도
보았다.
사람이 개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 저거 잡아!
전화 상자 근처, 한 남자가 다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숙희가 아는 얼굴.
코우즈키 어르신 집에 손이 많았던 날,
숙희가 연못에 빠지고, 소공녀가 다 젖은 날,
- 소공녀. 좋은 책이네.
숙희에게 손수건을 건네줬던 사람.
이름이 뭐였더라...
거리 곳곳에 숨어 있던 순사들이 남자의 옷을 이리저리 뒤졌으나,
편지 없어, 이놈 아니잖아!
좀 전에 편지 들고 나온 거 누구야!
그리고 그 순간 숙희 눈에 검은색이 펼쳐졌다.
버석한 얼굴, 야윈 몸의 누군가가 검은 옷자락으로 숙희의 눈을 가렸다.
옷 안주머니에는 제대로 넣지 못해 살짝 삐져나온 행운의 편지가 보였다.
편지를 못 봤더라도, 숙희는 이 사람이 고운임을 알 수밖에 없었다.
- 숙희야. 뛰어.
늘 기다리던 목소리.
남자의 이름을 미처 떠올리기 전에 고운이 숙희를 잡고 달렸다.
전화 상자 인근, 총과 칼을 든 사람들이 고운과 숙희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 저거 잡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