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우에 나오야 vs 알란 데이비드 피카소
잽이 다한 경기
"복싱은 잽으로 시작해서 잽으로 끝난다"는 복싱의 오랜 격언을 몸소 보여준 경기였다. 잽이 중요한 이유는 수없이 적어도 모자라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잽은 거리조절과 공격의 포문 역할에 있어 필수적인 동작이기 때문이다. 해서 스텝이 좋고 잽이 좋은 사람은 상대하기가 정말로 까다로울 수밖에 없는데, 물론 그만큼 좋은 스텝과 잽을 내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체력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그것이 12라운드까지 가능한 선수가 바로 이노우에 나오야이다. 꽉 찬 육각형 복서라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놀라운 선수다. 나오야의 주특기는 레프트지만, 실상 그가 경기를 지배하는 주먹은 스텝을 바탕으로 한 잽과 원투다. 물론 세계 챔피언이라면 누구나 기본기가 탄탄하겠지만, 다른 챔피언들보다도 나오야의 기본기가 특히 눈에 띄는 이유는 일본 복싱 특유의 그림같이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동작에 있다. 솔직히 말해 세계 챔피언들을 상대로 (그것도 리치 차이가 불리한 상황에서) 연속된 페인트 동작 없이 단순히 기회를 보고 정확히 노려서 잽을 정타로 맞춘다는 것은 재능의 영역임이 틀림없다. 나오야의 잽은 단순히 많이 맞춘다 수준을 넘어서 전 체급을 통틀어 5손가락 안에 드는 적중률이며, 그 잽 하나하나가 짤짤이용 잽이 아닌 강력한 파워잽이라는 부분에 있어서 혀를 내두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의 링네임처럼 괴물 같은 파워와 체력, 하체 힘에 있다. 마치 항시 강력한 스프링을 농축해 놓은 듯한 그의 하체에서 폭발적인 파워와 스피드가 뿜어져 나오고 그것이 그대로 잽으로 이어진다.
앞손 잽이 맞으면 뒷손은 무조건 맞출 수 있는 거리에 있다. 나오야는 1라운드부터 잽으로 거리 잡기를 성공하며 2라운드에 경이로운 수준의 연타를 선보였다. 보통 키가 큰 상대에게 많이 쓰는 전략이 몸통을 치는 것이고 나오야 역시 바디잽으로 피카소를 공략했는데, 이 바디잽을 시작으로 한 콤비네이션이 인상 깊었다. 바디잽을 치고 그대로 뒷손어퍼를 올린 뒤 연타를 이어가는 콤비네이션이었는데, 보통 아래위 레벨체인지의 경우 배에다 주고 잽을 뒷손으로 스트레이트나 훅을 올리기 때문에 뒷손으로 어퍼로 올리는 기술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나오야는 이를 작정하고 준비해 온 듯 반복적으로 선보였다.
거듭말하지만 나오야는 스텝을 바탕으로 한 잽이 완벽에 가까운 선수다. 해서 사실상 무리하지 않고 아웃복싱을 하며 잽 위주로 경기를 풀어나가기만 해도 이기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사람들이 복싱을 보는 재미를 위해 그는 인파이팅을 서슴지 않는다. 이번 경기 역시 상대가 인파이팅의 국가인 멕시코 선수인지라 나오야는 경기 전에 애초에 백스텝이 없는 복싱을 하겠다고 선언하고 링으로 올라왔으며, 그만큼 토투토의 화끈한 경기를 보여주었다.
피카소 역시 레프트바디가 주특기인 선수였는데, 레프트 바디 명장 나오야 앞에서는 역시 명함도 못 내미는 수준이었다. 거리가 생기면 잽과 원투가, 가까이 붙으면 오함마 같은 양훅과 바디샷이 날아오니 피카소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피카소 역시 폴 버틀러처럼 이기기 위한 시합이 아니라 버티기 위한 시합을 목적으로 링 위로 올라온 것이 뻔히 보였으나, 그 이노우에 나오야를 상대로 12라운드까지 버텨냈다는 부분은 분명 대단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