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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패맨 Nov 14. 2023

생활체육 복싱대회 후기 4

패배

폭풍전야

 부상으로 인해 경기를 포기하기로 한지 10일쯤 지났을까, 이러저러한 이유로 나는 다시 경기에 출전하기로 했다. 마음을 놓았다가 다시 잡았던 터라 운동은 물론 마음의 준비도 철저히 되어있지는 않았으나, 평소에 높은 강도는 아니더라도 꾸준히 운동을 해왔던 터라 그냥 원래 실력대로 하고 오자는 생각으로 시합에 임하기로 했다. 

 시합을 치른 곳은 1년 전과 같은 장소, 같은 링. 하지만 어째서 인지 그 장소는 물론 링의 크기도 전보다 훨씬 작아 보였다. 오전에 시합이 시작됐지만, 나는 몸무게도 있고 상황에 따른 시합의 변경도 있어서 내 차례는 한참 뒤에 있었다. 그렇게 약 7시간을 기다린 후에야 나는 준비를 마치고 시합용 글러브를 낄 수 있었다.

 역시나 상대는 나보다 덩치가 컸지만 이미 그런 것쯤은 예측하고 있던 바, 나는 관장님이 지시해 준 것만을 생각하며 링 위에 올랐다. 그때 올라가서 한 번 더 느꼈지만, 분명 1년 전과 같은 링임에도 그 링은 전보다 훨씬 작아 보였다. 그것이 익숙함 때문이었는지, 물리적으로 내가 조금이라도 커져서인지는 지금 생각해 봐도 잘 모르겠다.  

 심판이 다가와 헤드기어와 마우스피스, 그로인가드 등을 확인한 뒤 이내 주의사항을 알려주며 상대와 터치글러브를 시켰다. 상대와 내가 각자의 코너로 돌아가자 공이 울렸다. 마치 투견이 된 두 마리 개가 케이지안에 들어서 서로를 향해 다가가듯이, 상대와 나 역시 시간이 지나 자성이 많이 약해진 자석처럼 서서히 서로에게 다가갔다. 나는 항상 이 순간이 시합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어색하면서도 불편한 순간이라고 느낀다.

 



오늘도 난 패배했다
사진 출처 : Freepik

 내가 들어가지 않고 상대가 들어오게 만드는 것, 그렇게 상대를 속이다가 카운터를 날리는 것, 그것이 나의 작전이었다. 하지만 누구나 처맞기 전까지는 그럴싸한 계획을 갖고 있는 법(feat. 타이슨). 상대는 내가 카운터를 맞춰도 몰상식할 정도로 치고 들어왔으며 그 덩치와 힘, 막무가내의 주먹에 나는 밀리고 당황하여 뒤꽁무니를 치며 어설픈 자세로 카운터를 날려대기만 했다. 정확한 자세로 타격하지 못했기에 또 카운터를 때리고 나서 회피동작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에 링 위에서는 내가 카운터를 맞춰도 상대에게 곧바로 얻어맞는 그림이 펼쳐졌다. 나는 막무가내 러시에 대처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었다. 복싱도 아니고 붕붕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막싸움 같은 상대에게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던 것이다. 또 도망가더라도 넓게 돌며 여유롭게 빠져야 하는데, 여유는 무슨 안 맞으려고 급급하다 보니 백스탭이 아니라 말 그대로 "도망"처럼 보였고, 클린치를 할 때도 몇 대 얻어맞으면서 했으니 그리 성공적이지 못한 방어였다. 

사진 출처 : 티스토리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세컨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게 아니라 내 방식대로 움직이는 것도 필요했던 것 같다. 세컨의 말에만 집중한다고, 준비해 두고 쓰려던 잽잽투를 한 번도 안 썼기 때문이다. 잘한 점이 있다면, 저번 시합과 다르게 앞발을 제대로 넣어 뒷손 타격을 몇 차례 성공시켰다는 것과 상대가 들어올 때 카운터를 잘 먹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시합에서 내가 들어가서 때리는 그림 자체가 없었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볼 때 기세에서 너무 밀려 보였던 게 패배의 원인이었던 것 같다. 이게 진짜 복싱선수들 시합도 아니고, 내가 포인트로는 앞섰을지언정 기세에서 밀렸기 때문이다.

 시합이 끝나고 이번에는 그래도 심판이 내 손을 들어주지 않을까 내심 기대를 했지만 심판은 상대의 손을 들어주었고, 나는 힘 없이 링에서 내려왔다. 숨이 차고 앞다리 허벅지근육이 무거웠다. 거울을 보니 내 얼굴은 쌍코피가 나서 엉망이었고 머리도 산발이었다. 시합복은 물론 헤드기어와 마우스피스 역시 피범벅이었다. 집에 도착하니 머리가 띵하고 목근육이 아팠다. 가죽으로 된 헤드기어를 보니 여전히 피가 촉촉하게 서려있었다. 나의 헤드기어에는 피비린내가 나지 않는 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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