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버드나무
마을 중간쯤에 커다란 버드나무가 있다. 몇백 년은 된듯하다. 거대한 몸을 담에 기대어,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 마냥 가지들이 아래로, 아래로 축 처져 있다. 나무가 얼마나 큰지, 아이 세 명이 손을 잡고 팔을 벌려 둘레를 감싸고도 남는다. 계단식으로 집들이 지어져 있어, 큰 나무는 계단 끝부분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계단이 수직으로 겪기는 쪽은 뿌리가 드러나 있는데 그 뿌리들이 죄다 평지 쪽으로 뻗어 흙을 꽉 붙잡고 있다. 나는 가끔, 담을 넘어 계단 아래쪽에 있는 집의 지붕 위로 나무가 넘어가지 않을까 상상하며 불안하게 쳐다본다.
나무 그늘은 마을 사람들의 놀이터다. 그곳에 대나무로 만든 작은 평상이 있다. 누가 먼저 앉는지에 따라 주도권을 잡는다. 어른들이 먼저 앉으면 어른들의 놀이터가 되고, 아이들이 앉으면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다. 그러나 가끔 무서운 어른이 오면 아이들은 호로록 평상에서 내려온다. 겁이 좀 없는 아이는 어른들 엉덩이와 엉덩이 사이에 비집고라도 앉아 무엇인가 하는 척 버틴다. 아주머니들이 앉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주머니 중에 엄마가 있으면 아이는 엄마 등을 벽 삼아 좁은 곳이라도 재미있게들 논다. 아이들은 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놀기도 하고, 숨기도 한다.
어느 날, 한 집에 작은아들이 없어졌다고 엄마가 온 동네를 구석구석 다니며 찾았다. 알고 보니, 아침에 엄마에게 혼나고 집을 나갔다가, 저녁때가 되었는데 아이가 돌아오지 않았다. 이럴 때면 누구 아이 할 것 없이 온 동네 사람들과 아이 친구들이 이름을 부르며 찾아다닌다. 나무에 잘 숨어 있던 아이는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무 아래에서 들릴 정도가 되면, 무장 해제하고 내려온다. 엄마에게 “이노무새끼 어디 갔다왔노~어이~” 안심 섞인 말과 등 짝 스매싱 한 방 맞고는 맛있게 저녁 먹는 것으로 용서를 받는다.
여름밤이면 저녁을 먹은 후, 부채를 하나씩 들고 나와 나무 밑 평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그때는 아이들도 어른들 사이에 끼여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아이들을 놀리느라 무서운 이야기를 실감 나게 하는 어른도 있다. 아이들이 무서워 서로를 부둥켜안고 깜깜한 주변을 살핀다. 이때를 틈타, 짓궂은 어른이 갑자기 큰소리로 “왁!” 하고 깜짝 놀라게 해서 아이를 울린다. 도저히 무서워서 집에 못 가는 아이는 친구들이 함께 집까지 데려다준다. 흔들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별과 달을 보며 소곤소곤, 어른들의 이야기를 동화처럼 듣고 꿈을 꾸다 별을 센다.
우리 집 마루에 걸터앉아 고개를 들면 바로 버드나무가 보인다. 햇빛을 받고 살랑살랑 흔들리는 연둣빛 가지를 한참 멍하니 보고 있을 때 몽환적이다. 나는 이 느낌이 좋아 버드나무 보기를 즐겼다. 편안했다.
새벽안개가 덥힌 버드나무 아래에 정갈하게 차려입은 할머니가 정화수를 떠놓고 무엇인가 간절히 빌기도 한다. 우연히 보게 된, 어린 나는 참 묘한 기분이 들었다. 버드나무는 노쇠하여 힘들어도 모든 것을 품어준다. 우리 마을의 수호신일까? 마을 어른들은 이곳에서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나무는 아마도 나이테마다 마을에서 보고 들은 것을 빠짐없이 적어 놓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