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는 인생의 영화 같은 반전을 꿈꾼 적이 있었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기에 성공해서 부모님 호강시켜 드리고 싶었고, 달라진 모습으로 동창회에 나가 자랑도 하고 싶었다. 열심히 노력하면 뭔가 될 것 같았고 그래서 성실히 살아왔다. 하지만 아직도 그런 반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악조건 속에서 신화 같은 성공을 이룬 사람들을 보며 나도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왜 내 위의 유리천장은 깨지지 않는지 분해한 적도 있었다. 내 능력과 노력도 부족했고 환경이나 타이밍도 받쳐주지 않았던 것 같다. 옳고 그름을 너무 따지는 까다로운 성격도 한몫했다.
그러나 지금 내 삶이 분하거나 절망스럽진 않다. 세상의 성공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부족한 나를 받아들이고 소박지만 나름 재미있고 행복하게 지금 누리는 것들에 감사하며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내 인생의 후반전에도 드라마틱한 변화가 기대되지는 않는다. 지금의 나도 내가 계획해서 된 것이 아니기에, 내가 노력해서 이룰 수 있는 미래의 작은 일상에 집중해 보기로 했다.
나는 계속 일하고 싶다. 지금의 나를 봐선 시간적 경제적 자유를 이루고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지는 못할 것 같다. 그래서 최대한 오래 일해서 내 밥벌이는 내가 하고 싶다. 밥벌이라고 하니 내가 초라해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먹고살려고 돈을 번다. 나도 특별하지 않다. 그리고 직장에 매여서 일하고 싶다. 나는 자기 관리가 잘 안 되는 사람이라 제약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퍼져버릴 가능성이 크다. 아침에 일어나 나를 단장하고 출근할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
몸을 잘 관리해서 죽기 전까지 두 다리로 걸어 다니고 싶다. 나이 들어 몸이 여기저기 고장 나는 건 자연의 이치지만 다리가 불편하면 혼자서 아무 데도 갈 수 없으니 삶의 질도 떨어지고 가족들에게도 너무 큰 짐이 될 것이다.
나이보다 5년 정도만 젊어 보이고 싶다. 가끔 TV에서 50,60대 여성들이 20,30대처럼 꾸미고 나와 자신이 얼마나 젊어 보이는지 자랑하는 걸 보면 좀 징그럽다. 얼굴에 연륜과 깊이가 묻어나면서 “저 할머니 참 곱다.. 관리를 잘하셨네..”. 이런 얘기를 들으면 나이 드는 게 많이 서글프진 않을 것 같다.
아들이 아이를 낳는다면 가까이 살면서 돌봐주고 싶다. 이건 전적으로 며느리의 권한이니 내가 원한다고 되는 건 아니지만, 아들 부부의 짐도 덜어주고 나도 손주를 자주 볼 수 있으니 행복할 것 같다. 나이 들어서는 고독이 제일 무섭다. 더불어 살며 손주에게 멋있고 재미있고 따뜻한 할머니로 기억된다면 더 바랄 게 없다.
가끔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묻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닐, 나를 잘 알고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친구들이 4명 정도 있으면 좋겠다. 나까지 5명이 딱 차 한 대로 봄,가을 꽃구경 단풍구경 다니고, 집안의 대소사도 챙기면서 가끔 자식 자랑도 하는 그 진부한 일상을 누리고 싶다.
마지막까지 따뜻하고 겸손한, 성숙한 인간이 되고자 하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성숙의 길은 참 험난하다. 매일 몸부림치지만 제자리인 것 같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완벽해지는 게 아니라 마지막까지 끈을 놓지 않는 것이 아닐까. 나이 들었다고 세상사 다 아는 듯 한 표정 짓지 않고, 더 많이 용납하고 사랑하면서 가끔 때워 넣은 금니가 보일만큼 크게 웃고 재미있는 농담도 던지는 유쾌한 사람으로 살고 싶다.